상식 이야기

소금의 역사

국가가 독차지하고 세금을 매기고 전쟁까지 벌인 광물이, 가장 싼 조미료가 되기까지

  • 읽는 데 약 25분
  • 기원전 6천 년경 – 2017년
  • 챕터 11개
  • 그림 4장
  • 출처 29건

눈이 많이 온 날, 도로에 흰 알갱이를 뿌리며 지나가는 차를 본 적 있을 거예요. 그게 소금이에요. 미국 지질조사국이 집계한 2018년 미국 소금 소비를 보면, 가장 큰 몫은 도로 제설이었어요. 43%예요. 사람 입으로 들어가는 몫보다 훨씬 커요.

값도 그만큼 내려와 있어요. 같은 통계에서 땅에서 캔 암염의 평균 단가는 톤당 58달러였어요. 업체끼리 주고받는 도매 통계라 마트 진열대의 가격표와는 다른 숫자지만, 방향은 분명해요. 소금은 지금 트럭으로 실어다 길바닥에 뿌려도 아깝지 않은 물건이에요.

그런데 이 물건 때문에 나라끼리 전쟁을 했어요. 왕은 백성에게 먹지도 않을 소금을 해마다 정해진 양만큼 사게 했고, 제국은 밀수를 막겠다고 대륙을 가로지르는 선을 그었어요. 나중에는 바닷가에서 소금을 긁어 담는 것까지 법으로 막았고, 그 법을 어기다 감옥에 간 사람이 수만 명이에요. 도로에 뿌리는 저 알갱이가 2,000년 넘게 국가 재정의 기둥이었던 거예요. 이야기는 사람이 소금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아주 단순한 사실에서 시작해요.

한눈에 보는 연표

고대

  1. 기원전 6천 년경 루마니아 포이아나 슬라티네이, 신석기 제염 흔적
  2. 기원전 8~5세기 오스트리아 할슈타트 암염 광산 본격 가동

중국

  1. 기원전 119년 한 무제, 소금·철 국가 전매 시행

유럽

  1. 1158년 소금 통행세 다툼에서 뮌헨이 태어나다
  2. 1229년 루이 9세의 임시 소금 부과금, 가벨의 출발점
  3. 1246년 십자군 전비 대려 에그모르트 염전 조성
  4. 1482~1484년 베네치아와 페라라, 염전을 놓고 전쟁
  5. 1648년 모스크바 소금 폭동

인도

  1. 1869년 인도 내륙관세선 4,030km로 최장
  2. 1882년 영국령 인도, 소금법으로 채취·판매 독점
  3. 1930년 간디의 소금 행진, 단디 해안에서 소금법 위반

현대

  1. 1996년 비엘리치카, 소금값 하락으로 채굴 중단
  2. 2017년 중국, 2천 년 이어진 소금 전매를 끝내다

미국에서 소금이 가장 많이 가는 곳은 겨울 도로예요

2018년 미국 통계를 조금 더 들여다볼게요. 소금 소비에서 도로 제설이 43%, 화학공업이 39%였어요. 식품가공은 3%였고요. 농업이 3%, 일반 산업 2%, 상수도 처리 1%가 뒤를 이었어요.

여기서 '먹는 소금은 3%뿐'이라고 정리하면 틀려요. 마트에 놓인 봉지 소금은 통계에서 '유통업자' 항목(7%)에 섞여 있거든요. 그래도 방향은 분명해요. 소금의 가장 큰 고객은 사람의 혀가 아니라 겨울 도로와 화학공장이에요. 그리고 이건 미국 한 나라의 숫자라 세계 평균이 아니에요. 제설 수요는 그해 겨울 날씨에 따라 크게 흔들리기도 해요.

값도 눈여겨볼 만해요. 같은 통계에서 톤당 평균 단가는 형태에 따라 이렇게 갈렸어요. 소금물 상태 그대로면 10달러, 땅에서 캔 암염은 58달러, 바닷물을 말린 천일염은 100달러, 끓이거나 감압 증발시켜 불순물을 뺀 정제염은 200달러. 화학적으로는 모두 같은 염화나트륨인데 스무 배가 벌어져요. 비싼 쪽이 더 좋은 소금이라는 뜻은 아니에요. 값을 만드는 건 물질이 아니라 그것을 어떤 모양으로 다듬어 어디까지 옮겼느냐예요.

생산량은 어떨까요. 세계 소금 생산은 2024년 약 2억 8,000만 톤으로 집계됐어요. 중국 5,500만 t, 미국 4,000만 t, 인도 2,800만 t 순이에요. 눈여겨볼 것은 2018년의 3억 톤보다 오히려 조금 줄었다는 점이에요. 두 해는 집계한 기관과 판이 달라 그대로 견주기는 조심스러워요. 그래도 적어도 소금 생산이 최근 들어 늘고 있지는 않아요.

대신 이 흔한 물건에는 이상한 조건이 하나 붙어 있어요. 미국 지질조사국은 소금 항목에 대체재도 없고 재활용도 없다고 적어 놨어요. 아무리 싸도 없으면 안 되고, 다른 것으로 바꿔 쓸 수도 없는 물건이라는 뜻이에요.

여기까지가 이야기의 결말이에요. 흔하고, 싸고, 먹는 몫이 크지 않은 광물. 그런데 이 결말은 인류사 전체로 보면 아주 최근에 붙은 것이에요.

여기서 기억할 것 결말을 먼저 봤어요. 지금부터는 이 흔한 물건이 어쩌다 국가의 목줄이 됐는지를 거꾸로 따라갑니다.

왜 하필 소금이 세금 매기기 좋은 물건이었을까

사람들이 소금을 만든 흔적은 생각보다 이릅니다. 루마니아 룬카의 포이아나 슬라티네이 유적에서는 기원전 6천 년경 신석기 시대의 제염 흔적이 확인됐어요. 지금까지 확인된 가장 이른 조직적 소금 생산 가운데 하나예요. '세계 최초'라고 못 박기는 어려워요. 비슷한 시기의 후보지가 여러 곳이고, 발굴 보고마다 연대 폭도 넓거든요.

중국에서도 비슷한 시기의 증거가 나와요. 보하이만 남서 해안의 다원커우 문화 사람들은 약 6,000년 전 땅속에서 끌어올린 짠물을 끓여 소금을 얻었어요. 방식은 단순해요. 짠물을 졸이면 물은 날아가고 소금이 남아요. 문제는 연료였어요. 이 단순한 일이 실은 장작을 엄청나게 먹는 작업이라, 소금은 오랫동안 아무나 만들 수 없는 물건이었어요.

땅을 파서 캐는 소금도 있었어요. 오스트리아 할슈타트의 암염 광산은 기원전 8~5세기에 본격적으로 가동됐어요. 여기서 나온 유물이 특이해요. 소금이 유기물을 붙잡아 둔 덕분에 광부들이 신던 가죽신, 입던 직물, 나무로 짠 배낭과 연장이 썩지 않고 남았어요. 이 시기 유럽 철기 문화를 통째로 '할슈타트 문화'라 부르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에요. 소금이 무엇을 하는 물질인지, 광산이 스스로 증명한 셈이에요.

이제 국가 쪽에서 봅시다. 소금은 세금을 매기기에 이상적인 물건이에요. 조건이 세 개 맞아떨어져요. 첫째, 사람은 소금 없이 살 수 없어서 값이 올라도 구매를 크게 줄이지 못해요. 둘째, 나는 곳이 한정돼 있어요. 염전, 암염 광산, 소금 호수. 셋째, 그래서 길목만 막으면 통제가 돼요.

여기에 하나가 더 붙어요. 세금을 따로 걷지 않고 소금값 안에 얹어 팔면, 내는 쪽은 세금을 내고 있다는 자각이 옅어요. 징수 비용도 싸고 저항도 적어요. 이것이 전매예요. 국가가 생산이나 판매를 독차지하고, 세금을 물건값 안에 숨겨 걷는 방식이죠.

다만 이 통제에는 약점이 하나 있어요. 바닷물은 어디에나 있다는 것. 해안선이 길고 볕이 좋은 곳에서는 사람들이 그냥 바닷가에서 소금을 만들어 버려요. 이 약점은 뒤에서 아주 유명한 방식으로 터집니다.

여기서 기억할 것 소금이 표적이 된 이유는 귀해서가 아니라 통제하기 쉬워서였어요. 이 조건이 이야기 내내 반복됩니다.

기원전 119년, 나라가 직접 소금 장수가 되다

기원전 119년, 한 무제는 돈이 급했어요. 흉노와 싸우는 비용이 감당이 안 됐거든요. 답으로 나온 것이 소금과 철의 국가 전매였어요. 전국에 50여 개의 관영 제염소를 두고 죄수를 노동력으로 썼어요. 농민에게 세금을 더 걷는 대신, 어차피 사야 하는 물건의 값에 세금을 얹은 거예요.

이 결정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는 곧 드러나요. 무제가 죽고 실권을 잡은 곽광은 기원전 81년 조정에 토론을 붙였어요. 소금과 철의 전매를 계속할 것인가.

유가 쪽은 반대했어요. 국가가 백성과 이익을 다투어서는 안 된다는 논리였어요. 관영 공방이 만든 철기는 품질도 나쁘다고 꼬집었죠. 법가 쪽은 반박했어요. 전매를 없애면 그 이익은 대상인에게 돌아가 나라를 흔들 것이고, 군비는 결국 농민 증세로 메워야 한다고요.

결과는 절충이었어요. 술 전매만 폐지되고 소금과 철은 남았어요. 이 논쟁 기록을 훗날 환관이라는 관리가 『염철론』으로 엮었어요.

'국가가 시장에 개입해야 하는가'를 놓고 조정이 회의를 연 것이 2,000년 전이고, 그 안건이 소금이었어요. 논점은 지금 읽어도 그대로예요.

전매는 그 뒤로 계속 되살아나요. 8세기 후반 당의 재상 유안은 염철사를 정비해 소금 전매를 재건했어요. 당 말기 100년 동안 국가 세입의 절반 가까이가 소금에서 나왔다고 전해져요. 여러 개설서가 되풀이하는 서술이라 연도별 원자료까지 확인되지는 않지만, 규모의 방향은 분명해요. 나라 살림의 절반쯤을 조미료 하나가 떠받쳤다는 거예요.

명은 한 걸음 더 나갔어요. 1370년 개중법을 시행했는데, 상인이 변경 수비대에 군량을 실어다 주면 그 대가로 소금 판매 허가증인 염인을 받는 방식이었어요. 나라는 현금 없이 군량을 얻고, 상인은 소금 독점 이익을 얻어요. 소금 독점권이 사실상 화폐처럼 쓰인 거예요.

여기서 기억할 것 여기서 소금 전매라는 틀이 완성됩니다. 이 틀은 이야기의 마지막까지 살아남아요.

소금 위에 도시가 서고, 소금 때문에 전쟁이 났다

유럽에서 소금은 도시를 만들기도 했어요. 1158년 사자공 하인리히는 프라이징 주교령으로 흘러 들어가던 소금 통행 수입을 자기 쪽으로 돌리려고 새 다리와 시장을 만들었어요. 그 자리가 뮌헨의 기원이 됐어요. 도시가 생긴 이유를 소금 하나로 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소금길을 누가 쥐느냐가 계기 중 하나였던 건 분명해요.

폴란드에서는 소금이 곧 국고였어요. 13세기에 본격 채굴에 들어간 비엘리치카와 보흐니아 암염광은 번성기에 크라쿠프 왕실 수입의 최대 3분의 1을 댔어요. 어느 해의 수치인지까지는 확인되지 않으니 '한때 그랬다'로 읽는 편이 정확해요.

그리고 실제로 전쟁이 있었어요. 1482년부터 1484년까지 베네치아와 페라라 공국이 싸웠어요. 발단은 페라라가 코마키오 염전을 손에 넣으려 한 것이었어요. 베네치아의 소금 교역 독점이 흔들린다는 뜻이었거든요. 1484년 8월 7일 바뇰로 조약으로 베네치아는 폴레시네의 로비고와 포강 삼각주를 얻었어요. 조미료를 놓고 국가 간 전쟁이 벌어지고 국경이 바뀐 사례예요.

가장 격렬한 장면은 모스크바에서 나왔어요. 1648년 6월 1일 소금 폭동이 일어났어요. 차르의 최측근 보리스 모로조프가 여러 세목을 없애는 대신 소금에 세금을 몰아 붙인 것이 원인이었어요. 서류상으로는 깔끔한 세제 개편이었어요. 하지만 도시민과 장인들은 절인 생선으로 겨울을 났어요. 소금값이 오르면 식탁이 통째로 무너지는 사람들이었죠.

6월 2일과 3일 군중이 크렘린으로 몰려갔고, 6월 11일 모로조프는 수도원으로 유배됐어요. 1,700~2,000명이 죽고 가옥 1만 5,000~2만 4,000채가 불탄 것으로 기록돼요. 그런데 이 사건의 결말은 개혁이 아니었어요. 이듬해 만들어진 법전은 오히려 농노제를 굳혔어요. 소금세를 건드리는 일은 물건값이 아니라 사람들의 하루치 끼니를 건드리는 일이었어요.

여기서 기억할 것 소금세가 위험한 이유가 처음 드러납니다. 세율 몇 퍼센트가 곧바로 밥상으로 내려앉거든요.

같은 나라 안에서 소금값이 스무 배 벌어졌을 때

프랑스의 소금세에는 이름이 있었어요. 가벨이에요. 시작은 전비였어요. 1229년 루이 9세가 론강 하구를 장악하며 소금에 매긴 임시 부과금이 출발점이고, 1246년에는 십자군 자금을 대려고 에그모르트에 염전이 조성됐어요. 이 임시 부과금이 언제 상설 세금으로 굳었는지는 자료마다 갈려요. 1286년, 1341년, 1360년이 다 나와요. 확실한 것은 13~14세기에 걸쳐 전시 임시 부과금이 항구적인 왕실 세금으로 굳어졌다는 사실이에요.

문제는 세율이 아니라 지도였어요. 프랑스는 소금세 구역이 여섯으로 나뉘어 있었고 구역마다 값이 달랐어요. 1784년 재무총감 자크 네케르가 집계한 숫자를 보면, 브르타뉴에서 31수인 소금이 베리에서는 611수였어요. 같은 나라 안에서 약 스무 배예요.

세금이 가장 센 '대가벨 지역'에서는 여덟 살이 넘으면 해마다 정해진 양의 소금을 사야 했어요. 최대 7kg 정도였어요. 먹든 안 먹든, 필요하든 아니든 사야 하는 소금이었죠. 이 지역은 인구로는 프랑스의 3분의 1인데 소금 세수의 3분의 2를 냈고, 정작 소비한 소금은 전체의 4분의 1이었어요. 미움을 산 것은 세금의 크기가 아니라 이 불균형이었어요.

스무 배 차이 앞에서 밀매는 필연이었어요. 싼 지역에서 소금을 사다 비싼 지역에 넘기는 일을 '포 소니에'라 불렀고, 이를 단속하는 관리를 '가벨루'라 했어요. 가벨루는 영장 없이 집과 몸을 뒤졌어요. 여성들이 가짜 엉덩이 속에 소금을 숨겨 나르다 적발된 기록도 남아 있어요. 무장 밀매는 사형, 비무장은 갤리선 10년. 해마다 3,000명 남짓이 처벌받았는데도 밀매는 사라지지 않았어요.

그럼 혁명이 이 세금을 없앴을까요. 그렇지 않아요. 1790년 국민의회가 한 일은 가벨 위반으로 갇힌 사람들을 풀어 준 것이었어요. 세금 자체는 나폴레옹이 곧 되살렸고, 프랑스에서 가벨이 최종적으로 폐지된 것은 1945년이에요. 혁명 직후의 그 조치 이후로만 세어도 155년을 더 살아남은 거예요.

여기서 기억할 것 세금이 미움을 사는 자리는 세율표가 아니라 지도였어요. 그리고 미움만으로는 세금이 사라지지 않아요.

사하라에서 소금값을 정한 것은 낙타였다

1352년, 여행가 이븐 바투타는 사하라 한복판의 소금 광산 마을 타가자에 닿았어요. 시질마사에서 25일이 걸렸어요. 그가 본 마을은 이상했어요. 집을 소금 판으로 짓고 지붕은 낙타 가죽으로 덮었거든요. 소금 위에 세운 소금 마을이었죠. 낙타 한 마리에는 두꺼운 소금 판을 두 장씩 실었어요.

여기서 널리 퍼진 이야기 하나를 짚고 가야 해요. '사하라에서는 소금을 금과 같은 무게로 바꿨다'는 이야기예요. 그런데 이 교역의 1차 증언에 해당하는 이븐 바투타의 기록에는 그런 교환비가 없어요. 타가자에서 금가루가 거래된 것은 맞지만, 그것이 곧 등가 교환을 뜻하지는 않아요.

실제로 값을 정한 것은 거리였어요. 소금값은 주로 운송비에 따라 결정됐고, 왈라타에서 말리 수도로 가는 사이에 네 배로 뛰었어요. 비쌌던 것은 소금이 아니라 소금을 옮기는 일이었어요. 이 구분이 이야기 전체에서 중요해요. 소금이 귀한 광물이라 비쌌던 게 아니라, 나는 곳이 정해져 있고 옮기기 힘들어서 비쌌던 거예요.

교역로는 영원하지 않았어요. 타가자는 1591년 톤디비 전투 뒤 버려졌고, 교역 중심은 남동쪽으로 150km 떨어진 타우데니로 옮겨 갔어요.

바다 쪽에서는 반대 방향의 변화가 일어났어요. 17세기에 남유럽의 값싼 소금이 북유럽 해양국가에 공급되기 시작했어요. 그러자 대구를 소금에 절여 말리는 일이 처음으로 수지가 맞게 됐어요. 염장 대구는 오래 상하지 않고 배에 실을 수 있어서, 신대륙과 구대륙을 잇는 삼각무역의 한 축이 됐어요. 소금값이 조금 내려간 것만으로 대양 건너의 식량 지도가 바뀐 거예요.

같은 무렵 잉글랜드는 반대로 움직였어요. 1693년 윌리엄 3세 아래 소금세를 부활시켰고, 1696년에는 세율을 두 배로 올렸어요. 이 세금이 폐지되는 것은 한참 뒤인 1825년이에요.

여기서 기억할 것 값을 만든 것은 희소성이 아니라 거리였어요. 그렇다면 그 거리를 국가가 직접 관리하려 들면 어떻게 될까요. 다음 장의 무대는 인도예요.

4,030km 방벽과 한 줌의 소금

영국 동인도회사가 벵골을 쥔 뒤 소금세는 빠르게 올랐어요. 워런 헤이스팅스 시기를 거치며 벵골의 소금세는 마운드(약 37kg)당 0.3루피에서 3.25루피가 됐어요. 농업 노동자의 한 달 벌이가 3루피 남짓이던 때였어요. 두 숫자는 기준 연도와 지역이 달라, 곧바로 나눠 '한 달 임금으로 소금 37kg을 산다'고 계산하면 안 돼요. 그래도 세금이 어느 쪽으로 얼마나 기울었는지는 보여요.

세금이 무거우면 밀수가 생겨요. 1803년 영국은 벵골에 소금 세관을 세우기 시작했고, 이 세관들이 이어지고 자라나 아대륙을 가로지르는 내륙관세선이 됐어요. 1869년에는 히말라야에서 벵골만 인근 오디샤까지 4,030km에 이르렀어요. 상당 구간에는 가시나무를 심어 길렀어요. 살아 있는 울타리를 세운 거예요.

여기서도 과장은 조심해야 해요. 4,030km 전 구간이 산울타리였던 것은 아니에요. 1878년 기준으로 산울타리는 약 800마일이었고, 그중 상태가 '양호' 이상인 구간은 411.5마일이었어요. 그래도 규모는 놀라워요. 1872년 이 선을 지키는 인원은 14,188명이었어요. 영국인 장교 136명, 하급 간부 2,499명, 인도인 직원 약 11,288명. 소금과 설탕의 밀수를 막겠다고 대륙 하나를 가로질러 선을 그은 거예요.

이 방벽은 1879년 4월 1일 폐지됐어요. 이유가 흥미로워요. 영국이 라자스탄의 삼바르 염호를 손에 넣어 지역별 세율을 통일하자 밀수할 이유가 사라진 거예요. 세금이 없어진 게 아니라 통제하는 방식이 바뀐 것이었어요. 그리고 1882년, 영국령 인도는 소금법을 제정해 소금의 채취와 판매를 독점했어요. 인도인이 바닷가에서 소금을 긁어 담기만 해도 불법이 됐어요.

앞에서 말한 통제의 약점이 여기서 터집니다. 인도는 해안선이 길어요. 바닷물은 누구나 퍼 올릴 수 있어요. 그것을 법으로 막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약점이었어요.

1930년 3월 12일, 간디는 사바르마티 아슈람을 떠나 걷기 시작했어요. 78명이 함께 출발했어요. 24일을 걸어 4월 6일 단디 해안에 닿았고, 오전 8시 30분 소금을 집어 들며 소금법을 어겼어요. 걸은 거리는 387km로 적는 자료가 가장 흔해요. 자료마다 385km에서 390km 사이로 조금씩 달라요.

출발할 때 78명이던 행렬은 단디에 닿을 무렵 전혀 다른 규모가 돼 있었어요. 모여든 군중은 5만 명을 넘었고 행렬 길이는 3km 이상이었어요. 이후 이어진 불복종 운동 전체에서 6만 명이 넘는 인도인이 감옥에 갔어요. 당시 소금세는 영국령 인도 조세 수입의 8.2% 정도로 전해져요. 재정으로만 보면 압도적인 몫은 아니에요. 간디가 겨눈 것은 세수가 아니라, 바닷가의 소금까지 남의 것으로 만든 통치의 정당성이었어요.

1931년 간디-어윈 협정에는 해안 주민이 자가 소비용 소금을 채취할 수 있게 하는 내용이 담겼어요. 세금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어요. 그리고 4,030km짜리 관세선은 폐지된 뒤 거의 잊혔어요. 1995년 런던의 한 도서관 보존 담당자 로이 목샴이 문헌에서 우연히 그 존재를 발견하고 현장에서 흔적을 찾아, 몇 해 뒤인 2001년 책으로 냈어요.

여기서 기억할 것 제국이 소금을 쥐는 방식과, 그 쥔 손을 푸는 방식이 한 장에 다 들어 있어요. 여기가 이야기의 심장입니다. 다음 장에서는 소금을 만드는 기술 쪽이 바뀝니다.

소금이 봉지에서 파이프로 옮겨 간 날

소금을 캐는 기술도 극단으로 갔어요. 1835년 쓰촨 쯔궁에서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깊은 염정이 뚫렸어요. 깊이가 약 1,000m였어요. 기계가 아니라 사람 힘으로 무거운 끌을 떨어뜨려 조금씩 부수며 내려간 굴착이었어요. 지금도 남아 있는 선하이정의 깊이가 1,001.4m인데, 두 기록이 같은 우물을 가리키는지는 분명하지 않아요.

이 우물이 특별한 이유는 따로 있어요. 파 내려가다 나온 천연가스를 대나무 관으로 끌어와, 퍼 올린 염수를 졸이는 연료로 썼어요. 앞에서 소금 만들기의 발목을 잡은 것이 연료였다고 했죠. 쯔궁은 땅속에서 원료와 연료를 함께 꺼낸 셈이에요. 그리고 깊이 뚫는 이 기술은 훗날 유럽의 석유 시추로 이어져요.

진짜 전환은 화학에서 왔어요. 에르네스트 솔베이는 1861년부터 소금물과 석회석으로 소다회를 만드는 방법을 연구했고, 1864년 쿠이예에 공장을 세웠어요. 1890년대에는 세계 소다회의 대부분이 이 방식으로 만들어졌어요. 소다회는 유리와 비누, 세제의 기본 원료예요. 유리창이 값싸진 배경에 소금이 있는 거예요.

1892년에는 클로르알칼리 공정이 공업 규모로 돌아가기 시작했어요. 소금물에 전기를 흘려 염소와 가성소다를 뽑아내는 방식이에요. 염소로는 PVC와 살균제를 만들고, 가성소다로는 종이와 비누, 알루미늄 정련용 약품을 만들어요. 세계 염소 생산량은 2022년 약 9,700만 톤이었어요. 1987년 3,500만 톤에서 약 2.8배가 된 거예요.

이 변화가 소금의 신분을 바꿨어요. 앞에서 본 미국 통계에서 화학공업이 39%를 차지한다고 했는데, 그중 87%는 알갱이가 아니라 염수 상태로 공급돼요. 소금이 봉지에 담겨 팔리는 조미료에서, 파이프로 흘러 들어가는 산업 원료가 된 거예요.

같은 시기 소금은 공중보건의 도구가 되기도 했어요. 1922년 스위스가 요오드를 넣은 소금을 주 단위로 보급하기 시작했어요. 두 의사의 실험이 계기였고, 갑상샘종을 소금으로 막는다는 발상이 처음 국가 정책이 된 거예요. 1924년 5월 1일에는 미국 미시간에서 요오드 첨가 소금이 시판됐고, 그해 가을 모턴 솔트가 전국 판매를 시작했어요. 모두가 매일 조금씩 먹는다는 소금의 성질을, 이번에는 세금이 아니라 영양 정책이 활용한 거예요.

여기서 기억할 것 소금의 주인이 식탁에서 공장으로 넘어갑니다. 국가가 쥐고 있던 물건의 성격이 여기서 바뀌어요.

2,000년을 버틴 소금세는 어떻게 끝났을까

20세기가 되도록 소금세는 살아 있었어요. 오히려 더 깊이 들어가기도 했어요. 1913년 위안스카이는 열강 은행단과 선후차관을 맺으면서 염세를 담보로 잡혔어요. 영국인 리처드 데인이 1918년까지 중국 염무서를 이끌었고, 외국인 직원은 수십 명뿐인데 중국인 직원은 5,000명이 넘었어요. 나라의 소금세가 외채의 담보물이 된 거예요. 1931년에도 염세는 중국 국민정부 공식 예산 세입의 약 3분의 1로, 관세 다음가는 세원이었어요.

체제가 바뀌어도 제도는 남았어요. 1950년 2월 중화인민공화국은 중국염업총공사를 세워 소금 전매를 다시 확립했어요. 그리고 2014년 폐지가 발표되고 2017년 1월부터 생산자가 소비자에게 직접 팔 수 있게 되면서, 기원전 119년에 시작된 국가 소금 전매가 사실상 끝났어요. 2,000년을 훌쩍 넘긴 제도였어요. 다만 지금도 가격은 감시되고 소금 회사 대부분은 국유로 남아 있어요.

다른 나라도 비슷한 시기였어요. 프랑스의 가벨은 1945년에, 인도의 소금세는 1946년 네루의 손에서 폐지됐어요. 700년, 그리고 한 세기 넘게 이어진 세금들이 20세기 중반에 몰려서 사라진 거예요.

왜 하필 그 무렵이었을까요. 폐지 사유를 자료가 직접 적어 둔 곳은 없어요. 다만 같은 시기 소금의 처지가 어땠는지는 폴란드의 광산 하나가 보여 줘요. 비엘리치카는 1996년 식용 소금 생산을 멈췄어요. 700년 가까이 이어진 채굴을 끝낸 이유는 소금이 바닥나서가 아니었어요. 소금값 하락과 갱내 침수였어요. 한때 왕실 수입의 3분의 1을 대던 광산이, 소금이 너무 싸져서 캘 이유를 잃은 거예요.

이 광산은 지금 다른 방식으로 살아 있어요. 깊이 327m에 갱도 287km. 1978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초대 목록에 오른 열두 곳 중 하나였고, 2025년에는 191만 명이 찾아 역대 최다를 기록했어요. 소금을 팔던 자리가 풍경을 파는 자리가 됐어요.

정리하면 이래요. 봉기만으로 끝난 소금세는 드물었어요. 모스크바의 폭동은 오히려 농노제를 굳혔고, 프랑스에서는 혁명 직후의 조치 뒤로도 세금이 155년을 더 살아남았어요. 인도처럼 독립이 세금을 끝낸 곳도 있어요. 나라마다 사정은 이렇게 달랐지만, 20세기 중반에 여러 나라가 한꺼번에 손을 놓았다는 사실은 같아요. 예전 같으면 국가가 놓지 않았을 세원이었는데 말이에요. 그 시기가 소금이 통제할 값어치를 잃어 가던 시기와 겹친다는 점은 눈여겨볼 만해요.

여기서 기억할 것 2,000년을 버틴 세금들이 20세기 중반에 몰려 사라졌어요. 나라마다 사정은 달랐고, 그 시기는 소금값이 무너진 시기와 겹칩니다.

한국의 소금은 왜 서류상 광석이 됐을까

한국은 오랫동안 자염을 썼어요. 바닷물을 가마솥에 넣고 장작으로 졸여 만드는 소금이에요. 연료가 많이 들어 값이 쌀 수 없었어요. 조선까지 한국의 소금은 대체로 이 방식이었어요.

전매가 낯선 제도였던 것도 아니에요. 고려 충선왕은 1309년 각염법(榷鹽法)을 시행해 소금 굽는 가마솥을 나라가 거둬들이고 판매가를 정했어요. 앞에서 본 한 무제의 소금 전매와 발상이 같고, "국용에 대비한다"는 명분까지 닮았어요.

바뀐 것은 개화기예요. 1907년 인천 주안에 근대식 천일염전이 처음 만들어졌어요. 넓은 염전에 바닷물을 가둬 햇볕과 바람으로만 말리는 방식이라 연료비가 거의 들지 않아요. 대신 넓은 갯벌과 맑은 날씨가 필요해요.

이 염전을 누가 세운 것으로 볼지는 자료마다 갈려요. 대한제국 정부로 적기도 하고 통감부로 적기도 해요. 확실한 것은 시험 염전이 1907년 주안에 들어섰다는 것, 그리고 규모가 크게 불어난 것은 그 뒤라는 것이에요. 1908년부터 1911년 사이 26만 평, 1917년부터 1918년 사이 37만 평으로 넓어졌어요.

소금은 여기서도 전매 품목이 됐어요. 1921년 4월 1일 조선총독부 전매국이 다시 설치돼 담배·소금·인삼 등을 관장했어요. 1942년에는 조선염전매령이 제정되면서 소금 전매가 법령으로 자리를 잡았어요. 이 제도는 해방 뒤에도 한동안 남았다가 1962년에 폐지됐고, 이듬해 소금 사업은 완전히 민영화됐어요.

더 이상한 일은 그다음이에요. 1963년 10월 28일 제정된 염관리법은 소금을 '염화나트륨을 40% 이상 함유한 결정체'로 정의했어요. 먹는 물건이 아니라 성분으로 규정된 거예요. 이 법 아래에서 천일염은 광물로 취급됐어요. 1996년에는 먹는 소금의 관리가 염관리법에서 식품위생법으로 넘어갔지만 천일염은 넘어가지 못했어요.

그러다 2005년부터 정밀분석을 거쳐 2007년 11월 염관리법이 개정됐고, 2008년 3월 28일 천일염이 식품공전에 올랐어요. 1963년부터 세면 45년 만이에요. 그전까지 염관리법에는 '천일염'이라는 말 자체가 없었어요. 이 단어가 법에 처음 들어간 것이 2007년 개정이에요. 밥상에 매일 오르던 물건이 서류상으로는 45년간 광석이었던 거예요.

웃어넘길 일만은 아니에요. 소금은 먹는 것이면서 동시에 산업 원료라는 두 얼굴을 갖고 있어요. 앞에서 본 미국 통계에서도 소금의 큰 몫은 공장으로 갔어요. 어느 쪽 규제를 적용할지는 나라마다 정하기 나름이고, 그 결정이 어긋나면 이런 틈이 생겨요.

염전 자체도 줄었어요. 1970년 이후 산업화와 도시화로 많은 염전이 문을 닫았고, 지금은 신안과 부안 같은 서해안 갯벌 염전이 남아 이름을 알리고 있어요.

여기서 기억할 것 소금은 식품이면서 원료예요. 이 두 얼굴이 제도와 어긋날 때 생기는 틈을 한국 사례가 그대로 보여 줍니다.

값이 싸진 광물을 두고 지금 무엇을 볼 것인가

볼리비아의 우유니를 볼게요. 면적 10,582km²의 소금사막이고, 소금 매장량은 약 100억 톤으로 추정돼요. 그런데 실제로 캐내는 양은 연간 2만 5,000톤이 안 돼요. 매장량의 아주 작은 조각만 건드리는 거예요. 지금 이곳의 값어치는 소금이 아니라 그 아래의 리튬에 있어요. 볼리비아는 2024년 집계로 세계 리튬 자원의 약 22%를 보유한 것으로 잡혀요. 소금 호수의 가치가 소금에서 다른 원소로 옮겨 간 셈이에요.

싸다고 안전한 것도 아니에요. 미국은 2018년 기준 소금의 28%를 순수입에 기대고 있었어요. 수입선은 2014~17년 평균으로 칠레 38%, 캐나다 28%, 멕시코 11%, 이집트 4%였어요. 대체재도 없고 재활용도 되지 않는 물건을 3할 가까이 밖에서 들여오는 구조예요.

건강 쪽 이야기도 짚어 둘게요. 여기서는 사실만 옮길게요. 세계보건기구는 성인의 하루 나트륨 섭취를 2,000mg 미만, 소금으로는 5g 미만으로 권고해요. 2021년 세계 성인의 하루 평균 섭취량은 4,278mg, 소금으로 약 11g으로 추정돼요. 2023년 한 해 나트륨 과다 섭취와 연관된 사망은 약 170만 명으로 추정돼요. 이건 연관 추정치이지 인과가 확정된 숫자가 아니에요.

기관마다 선도 달라요. 미국심장협회의 권고는 하루 1,500mg으로 세계보건기구보다 엄격해요. 학계에도 실제로 이견이 있어요. 2016년의 한 리뷰는 나트륨 감축의 심혈관 효과를 지지하는 연구와 반박하는 연구가 함께 쌓여 있다고 집계했어요. 국제기구의 권고와 별개로, 세부 쟁점은 아직 정리되는 중이에요.

마지막으로 지켜볼 만한 것 세 가지만 정리해 볼게요.

첫째, 생산량이에요. 세계 소금 생산은 2018년 3억 톤에서 2024년 약 2억 8,000만 톤으로 오히려 줄었어요. 집계 기관이 달라 두 해를 그대로 견주기는 조심스럽지만, 적어도 늘고 있지는 않아요. 20세기 들어 소금이 싸진 흐름은 앞 장에서 본 변화와 이어져 있어요. 이 숫자가 다시 늘기 시작한다면 이유는 조미료가 아니라 화학공업 쪽에 있을 거예요.

둘째, 소금 호수의 용도예요. 우유니처럼 소금보다 리튬으로 값이 매겨지는 곳이 늘면, 그 지역의 정치와 환경 문제도 소금이 아니라 다른 축으로 옮겨 가요.

셋째, 나트륨을 둘러싼 논의예요. 국제기구의 권고와 각국 정책, 그리고 학계의 이견이 어떻게 정리되는지가 식품 표시와 가공식품 규격에 그대로 반영돼요.

2,000년 동안 소금은 국가가 쥐고 놓지 않은 물건이었어요. 지금은 겨울 도로에 뿌리고 파이프로 흘려보내요. 값이 싸졌다는 것과 중요하지 않아졌다는 것은 다른 말이에요.

여기서 기억할 것 값이 무너진 뒤에도 소금은 대체재 없는 물건으로 남아 있어요. 볼 자리가 정치에서 산업과 보건으로 옮겨 갔을 뿐이에요.

흔한 오해

오해

영어 salary(급여)는 로마 병사에게 소금을 급여로 준 데서 왔다.

사실

salary가 라틴어 salarium에서 왔고 salarium이 소금을 뜻하는 sal과 관련된 말인 것까지는 맞아요. 하지만 '로마 군단이 소금으로 급여를 받았다'는 이야기는 근거가 없는 것으로 정리돼 있어요. 한발 물러선 '소금 살 돈을 따로 줬다'는 설명조차 고대 사료의 뒷받침이 없어요. salarium이 왜 그런 이름인지는 지금도 불분명해요. 확인되는 것은 다른 쪽이에요. 로마에는 라틴어 '소금'에서 이름을 딴 살라리아 가도가 실제로 있었고, 사비니인이 티베르강 하구 염습지의 소금을 얻으러 그 길을 오갔어요.

오해

사하라에서는 소금을 금과 같은 무게로 바꿨다.

사실

이 교역의 1차 증언에 해당하는 1352년 이븐 바투타의 타가자 기록에는 그런 교환비가 나오지 않아요. 확인되는 것은 소금값이 주로 운송비로 결정됐다는 점, 그리고 왈라타에서 말리 수도로 가는 사이 값이 네 배로 뛰었다는 점이에요. 타가자에서 금가루가 거래된 것은 맞지만 그것이 등가 교환을 뜻하지는 않아요.

오해

소금세 때문에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고, 혁명으로 소금세가 사라졌다.

사실

가벨은 여러 불만 중 하나였지 혁명의 원인은 아니에요. 그리고 혁명이 세금을 없애지도 않았어요. 1790년 국민의회가 한 일은 가벨 위반으로 갇힌 사람들을 풀어 준 것이고, 세금 자체는 나폴레옹이 되살렸어요. 프랑스에서 가벨이 최종 폐지된 것은 1945년이에요. 가벨이 특히 미움받은 이유도 세율보다 지역 간 불평등 쪽이었어요.

오해

지금도 소금은 대부분 식용으로 쓰인다.

사실

2018년 미국 통계로는 도로 제설 43%, 화학공업 39%가 압도적이고 식품가공은 3%예요. 다만 반대로 '식용은 3%뿐'이라고 단정해도 틀려요. 마트에서 파는 봉지 소금은 '유통업자' 항목(7%)에 섞여 있거든요. 또 이건 미국 한 나라의 숫자라 세계 평균으로 옮기면 안 돼요.

그래서 한마디로

소금은 사람이 안 먹고는 못 사는데 나는 곳은 한정돼 있어서, 길목만 막으면 통제되는 물건이었어요. 그래서 기원전 119년 한 무제부터 프랑스의 가벨, 영국령 인도의 소금법까지 국가가 독차지하고 세금을 매기는 표준 품목이 됐고, 소금 때문에 도시가 서고 폭동이 나고 전쟁까지 벌어졌어요. 그런데 봉기만으로 끝난 소금세는 드물었어요. 모스크바에서도 프랑스에서도 세금은 폭동과 혁명 뒤에 살아 돌아왔고, 인도의 소금세는 독립과 함께 1946년 네루의 손에서 폐지됐어요. 나라마다 사정은 달랐지만 20세기 중반에 소금세들이 몰려서 사라졌고, 그 무렵 채굴·운송 기술과 화학공업은 이미 소금을 남아돌 만큼 싸게 만들어 두었어요. 지금 소금이 어디로 가는지는 미국 통계가 잘 보여 줘요. 겨울 도로와 화학공장이 대부분을 가져가죠. 그래도 대체재도 재활용도 없는 물건이라는 사실은 그대로예요.

이 이야기의 지금

참고 자료

본문의 연도와 숫자는 아래 자료를 근거로 씁니다. 틀린 곳을 찾으시면 알려주세요.

  1. History of salt Wikipedia (English) 신석기 제염 유적, 1158년 뮌헨의 기원과 소금 통행 수입, 폴란드 크라쿠프 염광이 왕실 수입의 최대 3분의 1
  2. Gabelle (프랑스 소금세) Wikipedia (English) 1229년 임시 부과와 1246년 에그모르트 염전, 여섯 개 세율 구역, 8세 이상 연 7kg 의무 구매, 1784년 네케르 집계, 가벨루의 수색과 처벌 규모, 1790년 수감자 석방과 1945년 최종 폐지
  3. Salt Satyagraha and Dandi March Gandhi Research Foundation (mkgandhi.org) 1930년 3월 12일 출발, 78명, 24일, 4월 6일 오전 8시 30분 단디에서 소금법 위반. 6만 명 이상 체포
  4. Salt in Chinese history (중국사 속의 소금) Wikipedia (English) 다원커우의 지하 염수 제염, 기원전 119년 전매와 50여 개 관영 제염소, 당 유안의 염철사, 1370년 개중법, 1913년 선후차관과 염무서, 1931년 예산의 3분의 1, 1950년 중국염업총공사, 2017년 전매 종료
  5. Discourses on Salt and Iron (염철론) Wikipedia (English) 기원전 81년 곽광이 소집한 토론, 유가와 법가의 논거, 술 전매만 폐지되고 소금·철은 유지
  6. Salt tax (소금세) Wikipedia (English) 잉글랜드의 1693년 재도입과 1696년 세율 인상, 1825년 폐지, 1946년 인도 소금세 폐지. 이 문서의 salary 어원 서술은 다른 문서와 충돌해 채택하지 않았어요
  7. Salary — salarium 어원 항목 Wikipedia (English) '로마 병사가 소금으로 급여를 받았다'는 통설이 근거 없다는 서술과, 완화된 설명조차 고대 사료의 뒷받침이 없다는 지적
  8. Via Salaria (살라리아 가도) Wikipedia (English) 이름이 라틴어 '소금'에서 유래했다는 점과 사비니인의 소금 획득 경로
  9. Salt Riot (1648년 모스크바 소금 폭동) Wikipedia (English) 모로조프의 소금 일괄 과세, 절인 생선에 의존한 도시민, 6월 1일 발발과 11일 유배, 사망 1,700~2,000명과 가옥 소실, 이듬해 법전과 농노제 고착
  10. Wieliczka Salt Mine (비엘리치카 소금 광산) Wikipedia (English) 13세기 채굴 시작과 1996년 식용 소금 생산 중단 사유(소금값 하락·갱내 침수), 깊이 327m·갱도 287km, 1978년 유네스코 초대 등재, 연 방문객 약 120만 명
  11. Inland Customs Line (인도 내륙관세선) Wikipedia (English) 1803년 벵골 세관, 1869년 최장 4,030km, 1872년 인원 1만 4,188명, 1878년 산울타리 실태, 1879년 폐지와 삼바르 염호, 헤이스팅스 시기 벵골 소금세 인상, 1995년 로이 목샴의 재발견과 2001년 저술
  12. Hallstatt (할슈타트) Wikipedia (English) 기원전 8~5세기 암염 채굴, 소금에 보존된 직물·나무·가죽·신발과 광부 배낭, 할슈타트 문화의 명명
  13. Solvay process (솔베이 공정) Wikipedia (English) 1861년 연구 시작과 1864년 쿠이예 공장, 1890년대 세계 소다회 대부분을 차지
  14. Chloralkali process (클로르알칼리 공정) Wikipedia (English) 1892년 공업 규모 생산 시작, 세계 염소 생산이 1987년 3,500만 t에서 2022년 약 9,700만 t으로
  15. Taghaza (타가자) Wikipedia (English) 1352년 이븐 바투타의 방문 기록, 소금 판으로 지은 집, 값이 주로 운송비로 결정되고 왈라타에서 말리 수도 사이 네 배 상승, 1591년 이후 타우데니로 이전
  16. War of Ferrara (1482~1484년 페라라 전쟁) Wikipedia (English) 코마키오 염전 장악 시도가 베네치아의 소금 교역 독점을 위협한 것이 원인, 1484년 8월 7일 바뇰로 조약
  17. Zigong (쯔궁) Wikipedia (English) 1835년 당시 세계 최심 염정(약 1,000m), 현존 선하이정 1,001.4m, 굴착 중 나온 천연가스를 염수 졸이는 연료로 사용
  18. Iodised salt (요오드 첨가 소금) Wikipedia (English) 1922년 스위스의 칸톤 단위 채택, 1924년 5월 1일 미시간 시판과 그해 가을 모턴의 전국 판매
  19. Morton Salt Wikipedia (English) 1924년 요오드 첨가 소금 출시와 전국 판매
  20. Dried and salted cod (염장 대구) Wikipedia (English) 17세기 남유럽의 값싼 소금이 북유럽에 공급되며 염장이 경제성을 갖게 된 과정, 삼각무역의 한 축
  21. Salar de Uyuni (우유니 소금사막) Wikipedia (English) 면적 10,582km², 소금 매장량 약 100억 t과 연간 채취량 2만 5,000 t 미만, 2024년 기준 볼리비아의 세계 리튬 자원 약 22% 보유
  22. Mineral Commodity Summaries 2025 — Salt U.S. Geological Survey (USGS), 2025년 1월 2024년 세계 소금 생산 2억 8,000만 t. 중국 5,500만 t, 미국 4,000만 t, 인도 2,800만 t, 독일 1,600만 t
  23. Mineral Commodity Summaries 2019 — Salt (원문 PDF) U.S. Geological Survey (USGS) 2018년 미국의 용도별 비중(제설 43%·화학 39%·유통업자 7%·농업 3%·식품가공 3% 등), 형태별 톤당 단가, 화학용 소금의 87%가 염수, 순수입 의존도 28%와 수입선, 세계 생산 3억 t, 대체재·재활용 없음
  24. Salt reduction (팩트시트) World Health Organization (WHO) 성인 나트륨 1일 2,000mg 미만 권고, 2021년 세계 평균 섭취 4,278mg, 2023년 나트륨 과다와 연관된 사망 약 170만 명. 2026년 5월 11일 갱신본
  25. Salt and cardiovascular disease Wikipedia (English) 미국심장협회의 1일 1,500mg 권고, 2016년 리뷰에서 나트륨 감축의 효과를 지지하는 연구와 반박하는 연구가 병존한다는 집계
  26. 천일염산업의 현황과 정책과제 (연구자료 D289) — 표 2-3 「국내 소금 관련 정책 변화」 한국농촌경제연구원 (한재환·최병옥, 2010년 6월) 1907년 주안 관영 염전, 1942년 조선염전매령, 1962년 전매제 폐지, 1963년 10월 28일 염관리법 제정, 1996년 식용소금 관리 이관, 2008년 3월 28일 천일염 식품공전 등재. 원자료는 전매청(1980·1981)과 대한염업조합
  27. 사료로 본 한국사 — 「소금 전매제의 시행」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고려 충선왕 원년(1309년) 2월 각염법 시행. 염분(제염 가마솥) 국유화와 판매가 규정
  28. 조선총독부 전매국 위키백과(한국어) 1921년 4월 1일 전매국 재설치와 담배·소금·인삼 등 전매 사무 관장 (전매 법령 연도는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자료로 확인)
  29. Poland's historic Wieliczka Salt Mine received record 1.9 million visitors in 2025 Notes From Poland, 2026년 1월 17일 2025년 방문객 191만 명으로 역대 최다. 2024년 대비 10% 증가
제작 2026-09-05 갱신 2026-09-05 검증 2026-09-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