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테크 이야기

자전거의 역사

미국에서 길을 먼저 요구한 것은 자동차가 아니었어요 — 요구한 쪽과 값을 낸 쪽이 달랐던 이야기

  • 읽는 데 약 21분
  • 1817 – 1916
  • 챕터 12개
  • 그림 7장
  • 출처 18건

자전거 도로 표지판을 보면 순서가 하나 보여요. 차도가 먼저 있고, 그 옆에 선을 그어 자전거의 몫을 나중에 표시해 둔 것처럼 보이는 순서요.

그런데 미국에서는 이 순서가 반대였던 때가 있어요. 포장된 길이 먼저 있고 자전거가 그 위에 올라탄 게 아니라, 길을 깔아 달라고 조직을 만들어 먼저 요구한 쪽이 자전거 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미국 정부가 낸 인구조사 보고서에 그렇게 적혀 있어요.

그러니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기계가 아니라 그 요구예요. 혼자서는 쓸모가 반쪽인 탈것이 하나 있었고, 그것을 쓰려면 함께 있어야 하는 것을 누군가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 값을 누가 내자고 나섰는가 하는 이야기는, 자동차가 길에 나타나기 전에 시작돼요.

한눈에 보는 연표

기계가 생기다

  1. 1817 드라이스, 발로 땅을 미는 두 바퀴를 타고 달리다
  2. 1866 랄르망 미국 특허 — 발판이 붙어 발이 땅에서 떨어지다

타는 사람들이 나서다

  1. 1880 미국 휠맨 연맹 결성 — 목적은 통행권과 도로 개량
  2. 1885 로버 안전 자전거 — 두 바퀴가 같아지고 체인이 뒷바퀴로
  3. 1888 던롭, 공기를 넣는 타이어를 특허로 출원·등록
  4. 1891 뉴저지, 주가 도로를 보조하는 미국 첫 법
  5. 1892 매사추세츠, 미국 첫 주 도로위원회
  6. 1893 3월, 연방 예산에 도로 조사비 1만 달러
  7. 1893 9월 가솔린차 시운전, 열이틀 뒤 도로조사국 개설

붐이 꺼지고 길이 남다

  1. 1900 자전거 118만 대 생산, 등록 자동차는 8천 대
  2. 1904 첫 전국 도로 조사 — 표면을 입힌 시골 길은 일부

한국

  1. 1905 한국, 「가로관리규칙」에 자전거 등불 조항
  2. 1913 전조선자전거경주대회에서 엄복동 우승

다음 탈것이 물려받다

  1. 1916 미국 연방 도로 보조법 — 주에 도로국을 두게 하다

「최초의 자전거」는 무엇의 최초일까요

수식어를 붙이지 않은 「최초의 자전거」에는 답이 없어요. 무엇을 기준으로 삼느냐에 따라 주인공이 바뀌거든요. 어떤 사람은 두 바퀴가 앞뒤로 놓인 것을 기준으로 삼고, 어떤 사람은 발이 땅에서 떨어진 것을 기준으로 삼습니다. 축을 다섯으로 갈라 놓으면 서로 다투지 않고 각자 제자리에 앉아요.

첫째, 발로 땅을 밀어 나아가는 두 바퀴. 1817년 6월, 카를 폰 드라이스가 만하임에서 자기 기계를 타고 달렸어요. 앞바퀴가 축을 중심으로 돌아 방향을 잡을 수 있다는 점이 그전 물건들과 달랐습니다. 둘째, 발이 땅에서 떨어진 것. 1866년 피에르 랄르망이 받은 미국 특허 제59,915호는 앞바퀴 축에 크랭크와 발판을 달았어요. 명세서에는 「빠를수록 똑바로 선 자세를 유지하기가 쉬워진다」고 적혀 있습니다.

셋째, 앞바퀴가 아주 커진 것. 1870년대의 고륜차예요. 페달이 앞바퀴에 직접 붙어 있으니 한 바퀴에 나가는 거리를 늘리려면 바퀴를 키우는 수밖에 없었고, 미국 인구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1886년쯤에는 앞바퀴 60인치에 뒷바퀴 16인치까지 갔어요. 넷째, 두 바퀴가 같아지고 체인이 뒷바퀴를 굴린 것. 1885년 코번트리에서 만들어진 로버가 그것이고, 오늘 자전거의 골격이 여기서 갖춰집니다.

다섯째, 공기를 넣은 타이어. 존 보이드 던롭이 1888년에 「자전거·삼륜차 및 기타 도로차의 바퀴 타이어 개량」으로 특허를 냈어요. 그런데 같은 발상의 특허가 1845년에 이미 있었습니다. 미국 인구조사 보고서는 그 특허가 왜 묻혔는지를 이렇게 적어요 — 「그때는 자전거 타는 사람이 없었고 그런 타이어를 쓸 데가 거의 없었다」.

다섯 축은 한 세대 안에 몰려 있지 않아요. 처음과 마지막 사이에 사람의 한평생만 한 시간이 놓여 있습니다. 「자전거가 언제 생겼느냐」에 한 해로 답할 수 없는 이유예요. 그리고 마지막 축이 이 글의 질문을 미리 보여 줍니다. 좋은 물건이 있어도 그것을 쓸 자리가 없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요. 타이어에게 그 자리는 자전거였고, 자전거에게 그 자리는 길이었습니다.

여기서 기억할 것 축을 정하지 않은 「최초」에는 답이 없어요. 그리고 다섯 번째 축이 이 편의 질문을 미리 보여 줍니다 — 쓸 자리가 없으면 발명은 상품이 되지 않아요.

발명자는 특허 신청서에 길의 상태를 적어 두었어요

드라이스는 1818년 1월에 바덴 대공국에서 10년짜리 특권을 받습니다. 그때 바덴에는 특허법이 없어서 대공의 허가가 특허를 대신했어요. 흥미로운 건 그가 낸 신청서의 내용이에요. 자기 기계가 얼마나 빠른지를 적으면서 길의 상태에 따라 네 등급으로 나눠 적었거든요.

미국 인구조사 보고서가 옮긴 그 문장은 이렇습니다. 잘 관리된 우편도로에서는 오르막이라도 사람이 걷는 만큼 간다. 평지에서는 큰비가 온 뒤라도 시속 6~7마일. 길이 마르고 단단하면 시속 8~9마일. 내리막에서는 말이 전속력으로 달리는 것과 같다. 성능을 하나로 말하지 못하고 노면별로 갈라 적은 거예요.

왜 그랬을까요. 이 탈것에는 말이 없기 때문이에요. 마차는 진창을 만나면 말을 한 마리 더 붙여서 지나갑니다. 값이 더 들 뿐 못 가는 건 아니에요. 그런데 자전거를 미는 힘은 타는 사람의 다리뿐이라 더 붙일 것이 없습니다. 게다가 마차 바퀴는 넓고 크지만 자전거 바퀴는 좁고 가늘어서 바퀴자국과 자갈과 모래에 그대로 빠져요.

하나가 더 있어요. 두 바퀴는 굴러야 서 있습니다. 랄르망이 특허 명세에 적은 그대로예요. 그런데 진창과 돌은 바로 그 속도를 빼앗습니다. 마차에게 나쁜 길이 「비싸지는 일」이었다면, 자전거에게 나쁜 길은 「못 가는 일」에 가까웠어요.

그래서 이 탈것은 처음부터 길과 짝으로만 쓸모가 있었습니다. 자전거를 사는 일과 길을 얻는 일이 따로였고, 앞의 것은 자기 돈으로 되는데 뒤의 것은 그렇지 않았어요. 공기를 넣은 타이어가 뒤늦게 큰 사건이 된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노면의 울퉁불퉁함을 타이어가 얼마쯤 대신 삼켜 주면, 같은 길에서 덜 튀고 덜 느려지거든요. 길을 못 고치면 바퀴라도 고쳐야 했던 셈이에요.

여기서 기억할 것 탈것과 길은 따로 팔리지만 따로 쓸 수는 없어요. 이 편에서 길은 배경이 아니라 부품입니다.

길을 안 깔던 데에도 그때의 계산이 있었어요

그러면 그때까지 왜 아무도 길을 안 깔았을까요. 게을러서가 아니라 셈이 그랬기 때문이에요. 길이 나쁘다는 것을 몰라서도 아니었습니다. 다들 알고 있었고, 다만 고치는 값을 누가 낼지가 정해지지 않았을 뿐이에요.

미국 여러 주의 도로 법은 「도로세를 몸으로 때우는」 방식 위에 서 있었어요. 주민이 정해진 날수만큼 자기 마차와 함께 나와 길을 손보면 세금을 낸 것으로 쳤습니다. 1888년 농무부 장관은 연차보고에서 이 제도를 이렇게 적었어요 — 「원리로 불건전하고 운용에서 불공정하며 실행에서 낭비적이고 결과에서 불만족스럽다. 영국의 부역 노동에서 빌려 온 봉건제의 잔재다」. 전문 시공자가 아니라 이웃들이 하루씩 나와 흙을 밀었으니, 길이 좋아지기 어려웠어요. 게다가 몸으로 때우는 세금은 성의를 재기가 어렵습니다. 하루를 나왔다는 사실은 남지만 얼마나 잘했는지는 남지 않으니까요.

여기에 하나가 겹칩니다. 장거리 화물은 이미 철도가 가져갔어요. 마을과 마을 사이의 흙길은 역까지 짐을 옮기는 구간이 됐고, 거기에 큰돈을 들일 이유를 대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길이라는 물건 자체가 까다로워요. 탈것은 혼자 사면 쓸 수 있지만 길은 혼자 깔 수 없습니다. 내 앞마당 구간만 깔아 봐야 그 앞뒤가 진창이면 소용이 없고, 깔아 놓으면 값을 안 낸 사람도 함께 지나가요. 요구하는 쪽과 값을 내는 쪽이 처음부터 어긋나 있는 물건입니다.

그러니 자전거 타는 사람 앞에는 두 갈래가 있었어요. 하나는 자기들 돈으로 자기들이 다닐 길을 깔아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남들이 깔게 만드는 것입니다. 앞의 길은 이어지지 않으면 값이 나오지 않아요. 그들이 고른 것은 뒤쪽이었습니다. 조직을 만들고, 신문을 내고, 주 의회를 찾아가는 쪽이요.

여기서 기억할 것 아무도 안 깐 것은 게을러서가 아니에요. 그때의 셈으로는 길에 돈을 쓰는 쪽이 손해였습니다.

타는 사람들이 단체를 만들어 길을 요구했어요

1880년, 미국의 자전거 클럽들이 모여 미국 휠맨 연맹을 만듭니다. 목적이 둘이었어요. 자전거가 공공 도로를 다닐 권리를 지키는 것, 그리고 도로를 개량하게 만드는 것.

연맹은 자기 역사를 적은 페이지에서 그때의 사정을 이렇게 씁니다. 자갈과 흙이 파여 바퀴자국이 난 길에 시달렸고, 말 탄 사람과 마차꾼과 보행자에게 배척당했다고요. 회원은 한때 10만 명을 넘었습니다. 연맹은 좋은 길을 주제로 한 정기간행물을 냈고, 소책자를 뿌렸고, 주 의회에 법안을 밀었어요. 이만한 규모의 취미 단체가 한 나라의 도로 정책을 두고 목소리를 낸 것은 그때로서는 낯선 장면이었습니다.

영국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1886년, 자전거 여행 클럽과 전국 자전거 연합이 함께 도로개량협회를 만들었어요. 영국 길에 자동차가 나타나기 전이었습니다. 다만 이쪽은 이 글이 숫자를 걸지 않은 대목이라, 그런 단체가 그 무렵 있었다는 정도로만 읽어 주세요.

한 가지 짚어 둘 것이 있어요. 단체가 요구했다는 것과 단체가 길을 놓았다는 것은 다른 말입니다. 연맹에는 도로를 깔 돈도 권한도 없었어요.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길이 나쁘다는 사실을 눈에 보이게 만들고, 그 값을 낼 수 있는 쪽을 설득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음 장면이 이 편에서 가장 재미있는 대목이 돼요.

이 편에서 가장 무거운 문장은 여기서 나옵니다. 1900년 미국 인구조사 보고서의 「자전거와 삼륜차」 장에 이렇게 적혀 있어요 — 「자전거의 매우 넓은 사용이 휠맨 연맹을 낳았고, 이 조직이 더 나은 길을 위한 운동을 시작했으며, 그것이 여러 주에서 공공 도로의 큰 개선으로 이어졌다」. 정부가 낸 통계 보고서가 직접 적은 문장입니다.

여기서 기억할 것 이 편에서 가장 무거운 문장은 정부 간행물이 적어 둔 한 줄이에요 — 요구를 시작한 쪽이 누구였는지까지.

그 소책자에는 자전거 이야기가 한 줄도 없어요

1891년, 휠맨 연맹의 도로개량 전국위원회가 소책자를 하나 냅니다. 제목이 『좋은 길의 복음』이고 부제가 「미국 농부에게 보내는 편지」예요. 자전거 단체가 낸 대표 문서입니다.

그런데 전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훑어봐도 자전거 이야기가 나오지 않아요. 「자전거」도 「타는 사람」도 본문에는 한 번도 안 나와요. 「휠맨」이라는 말이 나오는 자리는 셋인데 표지의 발행자 표시와 감사의 말, 그리고 책 끝에 붙은 연맹 임원 명부예요. 셋 다 본문 바깥입니다. 대신 처음부터 끝까지 말과 마차와 운반비예요.

필자는 이런 계산을 내놓습니다. 길만 좋으면 필요 없을 말을 미국 농가가 최소 200만 마리쯤 더 먹이고 있다고요. 그 말들에게 먹이는 건초와 귀리 값을 연 1억 1,400만 달러쯤으로 적습니다. 이건 필자 본인의 추산이니 그렇게 읽어야 해요. 그리고 봄비 뒤 진창길을 농부와 함께 다녀오는 장면을 길게 씁니다. 짐을 실으려고 말을 다섯 마리씩 매는 이웃에게 「두 마리로 될 일」이라고 말하는 대목이 있어요. 길을 고치는 값과 말을 더 먹이는 값을 나란히 놓고 어느 쪽이 싼지 따져 보게 만드는 구성입니다.

왜 이렇게 썼을까요. 길에 돈을 낼 사람은 자전거를 타는 도시 사람이 아니라 세금을 내는 농민과 그들의 표를 보는 정치인이었기 때문이에요. 요구를 관철하려면 요구하는 쪽의 이유가 아니라 값을 낼 쪽의 이유로 말해야 했습니다.

그렇다고 이걸 감춘 것도 아니에요. 표지에는 발행자가 휠맨 연맹이라고 또렷이 적혀 있습니다. 자기 이름을 걸되 자기 이유는 접어 둔 문서인 셈이에요. 그리고 이 방식은 실제로 통했습니다. 농민과 우편 배달 쪽이 이 논리를 자기 것으로 받아 들면서, 좋은 길 이야기는 자전거 타는 사람들의 요구가 아니라 시골의 요구가 됐어요.

여기서 기억할 것 이 편에서 가장 재미있는 자리예요. 요구는 요구하는 쪽의 언어로는 잘 통과하지 않습니다.

미국 연방이 도로에 처음 쓴 돈은 길을 놓으라는 돈이 아니었어요

요구는 제도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1891년 4월, 뉴저지가 주가 도로 개량을 직접 보조하는 법을 통과시켜요. 미국에서 처음이었고, 주가 3분의 1, 인접 토지 소유자가 10분의 1, 나머지를 카운티가 내는 구조였습니다. 연방 도로청 문서는 이 법이 휠맨 연맹과 한 협회가 밀어붙여 만들어졌다고 적어요. 이듬해에는 매사추세츠가 미국 첫 주 도로위원회를 세웁니다.

연방 차례는 1893년입니다. 3월 3일에 서명된 농무부 예산법에 도로 조사비 1만 달러가 실렸어요. 길을 놓으라는 돈이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놓는 것이 좋은지 알아보고 알려 주라는 돈이었어요. 그해 10월 3일 로이 스톤이 농무부 안에 도로조사국을 열었는데, 직원은 속기사 한 명이었습니다. 이 사무실이 뒷날 연방 도로청이 돼요.

이 사무실이 한 일도 길을 까는 게 아니었습니다. 소책자를 내고, 회의를 열고, 「본보기 도로」를 짧게 놓아 보여 줬어요. 1897년 6월에 놓은 첫 본보기 도로는 폭 8피트에 길이 660피트, 돌을 6인치 깔아 321달러가 들었습니다. 길이 아니라 시범입니다.

순서를 보면 이렇습니다. 미국에서 가장 이른 가솔린 자동차 가운데 하나로 스미스소니언이 적는 듀리에의 차가 시운전한 것은 1893년 9월 21일이에요. 도로조사국이 문을 연 것은 그로부터 열이틀 뒤고, 그 사무실을 만든 예산은 반년 앞서 서명돼 있었습니다. 1900년에 미국에 등록된 자동차는 8,000대였어요. 주 보조법과 주 도로위원회는 그보다도 앞섭니다.

그러니 「자동차가 생겨서 길을 깔았다」는 순서는 미국에서는 잘 맞지 않아요. 물론 이 사무실이 그해에 길을 깐 것은 아니고, 큰돈이 움직이는 것은 한참 뒤의 일입니다. 그래도 길을 다루는 자리와 사람과 예산 항목이 먼저 만들어져 있었다는 것은 남아요.

여기서 기억할 것 순서를 못 박는 자리예요. 길을 다루는 제도가 자동차가 흔해지기 전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레오나르도가 자전거를 그렸다」를 네 겹으로 재봤어요

자전거 이야기에서 가장 널리 도는 문장이 있어요.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자전거를 그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네 겹으로 갈라야 합니다.

첫째 겹은 널리 도는 문장 그 자체예요. 둘째 겹은 발표자가 실제로 한 주장입니다. 1974년에 코덱스 아틀란티쿠스의 한 낱장 뒷면에서 자전거처럼 보이는 그림을 공개한 사람은 문헌학자 아우구스토 마리노니인데, 그는 그것을 레오나르도의 손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제자가 잃어버린 원본을 옮겨 그린 것으로 설명했습니다. 널리 도는 문장은 처음부터 발표 내용과 달랐던 셈이에요.

셋째 겹은 유명한 반박입니다. 1997년 국제 자전거사 학회에서 한스에르하르트 레싱이 그 그림을 20세기의 위작으로 보는 발표를 했고, 언론은 이를 「복원 작업을 하던 수도사가 그려 넣었다」로 옮겨 크게 실었어요. 지금 인터넷에서 이 이야기를 검색하면 대체로 여기까지 나옵니다.

그런데 여기서 멈추면 유행하는 반대편에 선 것일 뿐이에요. 넷째 겹은 그 반박을 다시 재는 일입니다. 이 글을 쓰면서 확인한 범위에서, 그 발표의 근거는 정황과 문헌 대조였고 그림 자체의 연대를 물리적으로 쟀다는 공개 자료는 찾지 못했습니다. 발표문 원문도 열지 못했고, 반대편에서 반론을 정리한 자료는 학술지가 아니라 개인 연구 페이지였어요. 그래서 이 글은 어느 쪽으로도 판정하지 않고 갈린 채로 둡니다.

여기서 챙길 것은 어느 쪽이 옳은가가 아니에요. 유명한 반박을 옮겨 적는 일이 원문을 열어 본 것처럼 느껴진다는 점입니다. 반박이 널리 알려질수록 그것을 다시 재 볼 이유가 줄어들거든요. 그리고 이 그림이 진짜였다 해도 이 편의 이야기는 달라지지 않아요. 그런 기계를 그렸다 한들, 그것이 다닐 길이 없으면 그림으로 남았을 테니까요.

여기서 기억할 것 유명한 반박을 옮기는 일은 원문을 연 것과 달라요. 여기서 확인된 것은 양쪽 주장의 모양까지입니다.

「자전거가 여성을 해방했다」는 어디까지 확인될까요

또 하나 자주 인용되는 문장이 있어요. 자전거가 여성을 해방했다는 말입니다. 출처가 분명한 편이에요. 1896년 2월 2일 뉴욕 월드에 실린 대담 기사입니다. 기자 넬리 블라이가 수전 B. 앤서니를 만나 쓴 글이에요.

그 대목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자전거 타기에 대해 내 생각을 말하자면, 나는 그것이 세상 어떤 것보다 여성을 해방하는 데 더 많은 일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여성이 바퀴를 타고 지나가는 것을 볼 때마다 나는 서서 기뻐합니다.」 같은 대담에서 옷차림 이야기가 이어지고, 바퀴에 걸리는 치마와 얇은 레이스는 곤란하다는 취지의 말이 나와요.

여기까지가 확인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멈춰야 해요. 이건 한 사람의 대담 발언이지 조사 결과가 아니거든요. 얼마나 많은 여성이 자전거를 탔는지, 그 뒤 무엇이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이 기사가 재 준 것은 아닙니다. 이 글이 감당하는 것은 「그 시절에 그런 말이 있었고, 옷차림 이야기가 함께 나왔다」까지예요.

요구한 쪽의 얼굴도 한 번 봐 둘 만합니다. 도로를 공공의 것으로 만들자고 요구하던 그 연맹은, 1894년 2월 20일 총회에서 회원 자격을 백인으로 제한하는 결의를 127대 54의 비밀투표로 통과시켰어요. 세 번째 시도 만이었습니다. 그 결의는 오래 남아 있다가 1999년에야 후신 단체가 취소하고 사과했어요. 연맹 스스로 자기 역사 페이지에 적어 둔 내용입니다.

두 이야기를 나란히 두는 이유가 있어요. 이 편의 질문이 「누가 요구했는가」이기 때문입니다. 공공의 길을 요구하던 조직도 자기 안에는 선을 그었어요. 요구가 곧 모두를 위한 것이었다고 읽지 않는 편이 이 이야기를 정확하게 보는 방법입니다.

여기서 기억할 것 이 편이 감당하는 것은 「그 시절에 그런 말이 있었다」까지예요. 그리고 요구한 쪽에도 스스로 그은 선이 있었습니다.

미국의 자전거 붐은 자동차 때문에 꺼진 게 아니었어요

1890년대 미국의 자전거 산업은 빠르게 커집니다. 1890년에 27곳이던 자전거·삼륜차 공장이 1900년에는 312곳이 됐어요. 같은 기간 생산액은 256만 달러대에서 3,191만 달러대로 늘었습니다.

그런데 인구조사 보고서는 절정을 그 10년의 중간쯤으로 보고, 그 뒤로는 뚜렷한 감소가 있었다고 적어요. 이유로 드는 것은 자동차가 아닙니다. 공장이 열 배 넘게 늘면서 벌어진 격심한 값 경쟁, 그리고 10년 말의 위기에 작은 회사들이 밀려난 일이에요. 1900년 체인 자전거의 공장 출하 평균가는 18.91달러였습니다. 보고서는 「몇 해 전의 붐은 지나갔고 그 자리에 탈것으로서의 정상적인 수요가 자리 잡았다」고 적어요.

시기를 맞춰 보면 더 분명해집니다. 그 보고서가 센 바로 그해에 자전거 공장이 만든 자동차는 56대였어요. 모터사이클은 159대였고요. 같은 해 미국에서 만들어진 자전거는 118만 2,850대입니다. 자동차가 자전거를 밀어냈다고 하기에는 자릿수가 맞지 않아요.

자전거의 붐이 꺼진 것은 처음도 아니었습니다. 1869년에도 벨로시페드 열풍이 절정에 이르러 실내 주행장과 강습소가 곳곳에 생겼다가 두 해쯤 뒤에 사그라들었어요. 그때 꺼진 이유는 값이 아니라 기계였습니다. 쇠바퀴에 쇠 프레임이라 타는 일이 고돼서 「뼈 흔드는 것」이라고 불렸거든요.

두 번의 붐이 꺼진 이유가 서로 다르다는 게 중요해요. 한 번은 기계가 사람을 지치게 해서였고, 한 번은 만드는 쪽이 너무 많아져서였습니다. 그 사이에 길에 대한 요구는 끊기지 않고 남았어요. 붐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것은 공장이 아니라 주와 연방에 생긴 도로 조직이었습니다.

여기서 기억할 것 붐이 꺼진 이유와 다음 탈것이 온 시점은 다른 사건이에요. 순서를 뒤집으면 뒷이야기가 안 보입니다.

다음에 온 탈것은 무엇을 물려받았을까요

요구는 이어받는 쪽이 있어야 제도가 됩니다. 자전거 타는 사람들이 시작한 좋은 길 운동은 곧 농민과 우편 배달 쪽으로 넘어갔어요. 연방 도로청 문서는 이 운동이 「원래 자전거의 인기에 기반했고 자동차 시대에 더 강해졌다」고 적습니다.

먼저 물려받은 것은 길과 그 길을 다루는 행정이에요. 1904년에 연방이 도시 바깥 도로를 처음 전국 조사했을 때, 시골 공공도로는 약 200만 마일인데 자갈이나 돌로 표면을 입힌 곳은 약 15만 4천 마일이었습니다. 아직 갈 길이 멀었다는 뜻이지만, 조사를 할 기관과 주마다의 도로 조직은 이미 있었어요. 1916년 7월 11일 서명된 연방 도로 보조법은 7,500만 달러를 배정하면서 보조를 받으려면 주에 도로국을 둘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해 미국에 등록된 자동차는 361만 7,937대였어요.

부품도 넘어갔습니다. 한 산업사가는 자동차 산업이 자전거 제조사에게서 가벼우면서 튼튼한 강관 프레임, 체인 구동, 볼·롤러 베어링, 차동기어를 물려받았다고 정리했어요. 강판을 눌러 부품을 찍는 공정과 강관 제조법도 자전거 쪽에서 자랐습니다. 자전거를 만들던 사람들이 자동차를 만들기 시작한 사례도 여럿 있고요. 가볍고 튼튼한 것을 많이 만들어 본 경험이 옆 산업으로 건너간 셈이에요.

다만 여기서 못을 하나 박아 둘게요. 1900년에 미국 자전거 공장이 만든 자동차가 56대였다는 숫자를 다시 봅니다. 물려준 것이 있다는 사실과 한쪽이 다른 쪽을 낳았다는 말은 다른 문장이에요. 자동차에는 자전거와 상관없이 자란 계통도 여럿 있고, 이 글이 확인한 것은 「앞선 공급원 가운데 하나였다」까지입니다.

여기서 기억할 것 여기까지가 「물려받은 것」 이야기예요. 부품이 이어진 것과 한쪽이 다른 쪽을 낳았다는 것은 다른 문장입니다.

한국 — 첫 규정은 길을 관리하는 규칙 안에 있었어요

한국 쪽 자료는 얇습니다. 그러니 얇은 대로 적을게요.

국가기록원은 자전거가 한국 기록에 나타나는 시점을 1890년대 후반으로 잡고, 1896년에 한 관리가 자전거를 타고 장안 거리를 돌아다녔다는 기록을 소개해요. 백과사전 항목 쪽은 누가 언제 처음 들여왔는지를 확정하지 못한다고 적습니다. 1903년에 조정 관리용으로 100대쯤 들여왔다는 기록도 있어요. 이 계열의 이야기는 대체로 뒷사람이 정리한 것이라, 어디까지가 당대의 기록인지 구분해서 읽는 편이 좋습니다.

확실한 자리가 하나 있습니다. 1905년 12월, 「가로관리규칙」에 밤에 등불 없이 자전거를 타는 것을 금한다는 조항이 들어갔어요. 한국에서 자전거를 다룬 첫 규정이 탈것을 다루는 법이 아니라 길을 관리하는 규칙 안에 있었던 겁니다. 이 편의 축과 같은 자리예요.

그 뒤로는 경기 이야기가 남습니다. 1906년 4월 22일 훈련원에서 상금 100원을 걸고 첫 대회가 열렸고, 1913년 4월 13일 서울 용산에서 열린 전조선자전거경주대회에서 엄복동이 우승했어요. 광복 직후에는 서울의 자전거가 1946년 2만 9,507대, 1947년 5만 2,451대로 집계됩니다. 다만 이 계열의 숫자는 해마다 세는 범위가 달라 보여서, 두 해를 잇대어 증가폭을 계산하지는 않았어요.

미국과 견주면 다른 점이 눈에 띕니다. 미국에서는 타는 사람들이 먼저 모여 길을 요구했고 그 요구가 제도를 만들었어요. 한국에서는 기계가 들어온 뒤 곧바로 관이 규칙을 붙였고, 그 규칙이 놓인 자리가 길을 관리하는 문서였습니다. 요구가 아래에서 올라온 쪽과 규칙이 위에서 내려온 쪽이 다른 모양이에요. 다만 이 대목은 자료가 얇아 여기까지만 적어 둡니다.

여기서 기억할 것 한국 자료는 얇아요. 다만 첫 규정이 놓인 자리가 이 편의 축과 같은 곳이라는 것까지는 보입니다.

다음 장면은 어디를 보면 될까요

예측이 아니라 관전법이에요. 새 탈것이 나올 때마다 되풀이되는 질문이 몇 개 있습니다.

첫째, 누가 요구하고 누가 값을 내는가. 이 편에서 요구한 쪽과 돈을 낸 쪽은 처음부터 달랐어요. 요구는 자전거 타는 사람들이 시작했고, 돈은 주와 카운티와 연방이 냈고, 정치적 무게는 농민과 우편이 실었습니다. 새로 등장하는 탈것을 볼 때도 이 셋을 갈라 보면 이야기가 훨씬 또렷해져요.

둘째, 숫자가 무엇을 세는지 보는 일입니다. 이 글에 나온 「등록 자동차 8,000대」는 주에 등록된 수이지 굴러다닌 수가 아니에요. 「표면을 입힌 길 약 15만 4천 마일」의 「입혔다」에는 흙을 다진 것까지 들어가고요. 교통을 다루는 기사를 읽을 때 한 번씩 확인해 볼 만한 자리입니다.

셋째, 길이 먼저인지 탈것이 먼저인지예요. 오늘도 새 탈것이 나올 때마다 같은 질문이 돌아옵니다. 다닐 자리를 먼저 만들고 탈것을 들일 것인가, 탈것이 먼저 늘어난 뒤에 자리를 정할 것인가. 어느 쪽이 옳은지는 이 글이 판정할 일이 아니에요. 다만 지난번에는 요구가 먼저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넷째, 갈린 채로 남은 것들이에요. 르네상스 화첩의 그림도, 「해방했다」는 문장도 아직 갈려 있습니다. 앞의 것은 그림의 연대를 재는 결과가 공개되면 움직일 테고, 뒤의 것은 그 시절의 기록이 더 나오면 움직이겠지요. 갈린 자리를 갈린 채로 기억해 두면, 뒤에 나오는 새 자료가 무엇을 바꾸는지 알아보기가 쉬워집니다.

마지막으로 하나. 이 이야기에서 주인공은 기계가 아니라 요구였어요. 요구한 쪽과 값을 낸 쪽과 그 길을 물려받은 쪽이 각각 달랐다는 것이 이 편이 남기는 문장입니다.

여기서 기억할 것 예측이 아니라 관전법이에요. 누가 요구하는가, 누가 값을 내는가, 그리고 그 숫자가 무엇을 세는가.

흔한 오해

오해

포장도로는 자동차 때문에 생겼다.

사실

미국을 기준으로 보면 순서가 반대에 가까워요. 자전거 클럽들이 1880년에 연맹을 만들어 도로 개량을 요구했고, 주가 도로를 보조하는 첫 법과 첫 주 도로위원회, 연방의 첫 도로 사무실이 모두 미국에 자동차가 거의 없던 때에 만들어졌습니다. 1900년에 등록된 자동차는 8,000대였어요. 다만 그 요구를 이어받아 큰돈이 움직이게 만든 것은 농민과 우편 배달, 그리고 뒤에 온 자동차 쪽입니다.

오해

자전거가 자동차를 낳았다.

사실

물려준 것은 확인되지만 「낳았다」는 그보다 넓은 말이에요. 한 산업사가는 자동차 산업이 자전거 제조사에게서 강관 프레임과 체인 구동, 볼·롤러 베어링, 차동기어를 물려받았다고 정리했습니다. 그런데 1900년 미국 인구조사에서 자전거 공장이 그해 만든 자동차는 56대였어요. 부품과 사람이 이어진 것과, 한쪽이 다른 쪽을 만들어 냈다는 것은 다른 문장입니다.

오해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자전거를 그렸다.

사실

널리 도는 이 문장은 1974년의 발표 내용과도 달라요. 그림을 공개한 문헌학자는 그것을 레오나르도의 손이라 하지 않고 제자가 잃어버린 원본을 옮겨 그린 것으로 설명했습니다. 1997년에는 그 그림이 20세기의 위작이라는 학회 발표가 나왔고 언론이 크게 옮겼어요. 다만 그 발표의 근거는 정황과 문헌 대조이고, 그림 자체의 연대를 물리적으로 쟀다는 공개 자료는 이 글이 찾지 못했습니다. 아직 갈려 있는 문제예요.

오해

공기 타이어는 던롭이 처음 생각해 냈다.

사실

같은 발상의 특허가 1845년에 이미 있었어요. 1900년 미국 인구조사 보고서는 그 특허가 묻힌 이유를 이렇게 적습니다 — 「그때는 자전거 타는 사람이 없었고 그런 타이어를 쓸 데가 거의 없었다」. 발명이 상품이 되려면 그것을 쓸 물건과 쓸 사람이 함께 있어야 했습니다.

오해

자전거 붐은 자동차가 나오면서 꺼졌다.

사실

시기가 맞지 않아요. 1900년 미국 인구조사 보고서는 절정을 1890년대 중반쯤으로 보고, 그 뒤의 하락을 공장 수 급증과 값 경쟁, 그리고 10년 말의 위기로 설명합니다. 열 해 사이에 공장이 27곳에서 312곳으로 늘었고 체인 자전거의 공장 출하 평균가는 18.91달러였어요. 자동차가 미국 길을 채우는 것은 그 뒤의 일입니다.

그래서 한마디로

자전거는 혼자서는 쓸모가 반쪽인 탈것이었어요. 말이 없으니 진창에서 힘을 더할 수가 없고, 바퀴가 좁아 자갈에 빠지고, 속도를 잃으면 넘어집니다. 그래서 타는 사람들이 조직을 만들어 길을 깔아 달라고 요구했고, 1900년 미국 인구조사 보고서는 그 단체가 좋은 길 운동을 시작했다고 적었습니다. 다만 그들이 길을 만든 것은 아니에요 — 소책자에서 자전거를 한 줄도 팔지 않고 말과 운반비로 농민을 설득했고, 실제로 돈을 낸 것은 주와 연방이었으며, 요구를 이어받은 것은 농민과 우편, 그리고 뒤에 온 자동차였습니다.

참고 자료

본문의 연도와 숫자는 아래 자료를 근거로 씁니다. 틀린 곳을 찾으시면 알려주세요.

  1. Creation of a Landmark: The Federal Aid Road Act of 1916 Richard F. Weingroff / 미 연방 도로청(FHWA) 도로사 1891년 뉴저지 주 보조 도로법, 1892년 매사추세츠의 미국 첫 주 도로위원회, 1916년 연방 도로 보조법의 배정액과 주 도로국 요건을 확인했다
  2. 제12차 미국 인구조사(1900) 제10권 제조업 4부 — 「자전거와 삼륜차」 U.S. Census Office 휠맨 연맹이 좋은 길 운동을 시작했다는 문장, 공장 수·생산액·자전거 생산 대수·평균가·자전거 공장이 만든 자동차 수, 드라이스 특권 신청서 인용, 앞선 공기 타이어 특허가 묻힌 이유
  3. The Gospel of Good Roads: A Letter to the American Farmer (Isaac B. Potter) League of American Wheelmen, 1891 / Internet Archive 전문을 내려받아 확인했다. 본문에 자전거 언급이 없다는 것, 말 200만 마리 추산, 1888년 농무부 장관의 도로세 제도 비판 인용
  4. Highway Statistics Summary to 1995, 표 MV-200 (주별 자동차 등록, 1900~1995) 미 연방 도로청(FHWA), 1997년 4월판 1900년 8,000대, 1916년 361만 7,937대. 발행 시점이 인쇄된 고정판
  5. The Office of Road Inquiry — General Roy Stone and The New York Times 미 연방 도로청(FHWA) 도로사 1893년 도로 조사비 1만 달러와 도로조사국 개설, 직원 구성, 1897년 첫 본보기 도로의 비용
  6. The Object Lesson Road (Back in Time) 미 연방 도로청(FHWA) 도로사 1904년 첫 전국 도로 조사의 총연장과 표면을 입힌 길, 본보기 도로의 치수
  7. The Bicycle, a Technical Precursor of the Automobile (Martha Moore Trescott) Business and Economic History, Business History Conference 자동차 산업이 자전거 제조사에게서 물려받은 것들(강관 프레임·체인 구동·볼과 롤러 베어링·차동기어)
  8. Duryea Motor Carriage, 1893 (소장품 기록 TR.307199) Smithsonian National Museum of American History 1893년 9월 21일 시운전. 박물관은 「최초」가 아니라 「가장 이른 것 가운데 하나」로 적는다. 웹아카이브 고정본으로 확인했다
  9. 미국 특허 제59,915호 — Improvement in Velocipedes (Pierre Lallement) United States Patent Office, 1866 앞바퀴 축에 크랭크와 발판을 단 구성, 「빠를수록 똑바로 선 자세를 유지하기 쉽다」는 서술
  10. World Day of the Bicycle — 자전거와 지식재산 DPMA (독일 특허상표청) 1817년 6월 첫 주행과 1818년 1월 바덴 대공국의 10년 특권
  11. Rover 'Safety' Bicycle, 1885 (소장품 기록) Science Museum Group Collection 1885년 코번트리 제작, 마름모꼴 프레임과 뒷바퀴 체인 구동. 웹아카이브 고정본으로 확인했다
  12. Dunlop's pneumatic tyre (Inventions that made history) DPMA (독일 특허상표청) 1888년 말 특허 신청, 그리고 앞선 공기 타이어 특허를 영국 특허청이 놓쳤다는 서술
  13. Equity and Our History League of American Bicyclists (구 League of American Wheelmen) 1880년 창립과 목적, 회원 규모, 1894년 총회의 회원 자격 제한 결의와 표결, 1999년 취소와 사과
  14. 기록으로 만나는 대한민국 — 자전거 국가기록원 한국 도입 관련 기록, 1905년 「가로관리규칙」, 1906년 첫 대회, 1913년 전조선자전거경주대회
  15. 자전거(自轉車)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도입 시기를 확정하지 못한다는 서술, 첫 대회와 상금, 광복 직후 서울의 자전거 대수
  16. Champion of Her Sex — 넬리 블라이가 만난 수전 B. 앤서니 (New York World, 1896년 2월 2일) New York World / 전문 옮김본 원 지면이 아니라 발행지와 발행일을 밝힌 전문 옮김본이다. 인용한 대목과 옷차림 대목을 여기서 확인했다
  17. Roads Improvement Association 위키백과 / AARoads Wiki 서사 배경용. 1886년에 영국의 자전거 단체 둘이 함께 세웠다는 것까지만 썼고 숫자는 여기 기대지 않았다
  18. Leonardo's bike sketch termed a forgery (1997년 10월 16일) Deseret News 학회 발표를 옮긴 보도이지 발표문 원문이 아니다. 1974년의 공개 경위와 1997년 위작 주장의 내용을 확인했다
제작 2026-09-06 갱신 2026-09-06 검증 2026-09-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