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는 이름이 바뀌어도 이어져요. 주인이 바뀌어도, 사장이 바뀌어도요. 회사에 돈을 넣은 사람이 세상을 떠나도 그 몫은 남고, 회사가 망해도 그 사람이 넣은 돈보다 더 물어내지는 않아요.
너무 당연해 보여서 자연법칙처럼 느껴지죠. 그런데 이 네 가지는 서로 다른 시대에, 서로 다른 이유로, 하나씩 따로 붙었어요. 어떤 것은 법에 적힌 대로 생겼고, 어떤 것은 법에 적힌 것을 지키지 않아서 생겼어요.
지키지 않아서 생긴 쪽이 더 이상해요. 400년 전 어느 회사의 설립 문서에는 10년 뒤에 출자자들에게 돈을 돌려주겠다고 또렷하게 적혀 있었어요. 그 돈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고요. 그 자리에서 지금 우리가 아는 회사의 모양이 나왔어요.
한눈에 보는 연표
지분의 시작
- 1372 툴루즈의 방앗간들이 합쳐 지분을 나눠 갖다
특허장의 시대
- 1600 영국 동인도회사, 헌장으로 법인이 되고 승계를 얻다
- 1602 네덜란드 헌장 — 자본을 10년 동안 묶어 두다
- 1610 갖고 있지 않은 주식을 파는 것을 금지하다
- 1622 돌려주기로 한 자본이 돌아오지 않다
- 1623 주주가 처음으로 장부를 볼 위원회를 얻다
버블과 금지
- 1720 남해회사가 무너지고 거품법이 만들어지다
- 1776 애덤 스미스, '남의 돈을 관리하는 사람들'
- 1825 거품법 폐지 — "사실상 사문이었다"
법이 열어 주다
- 1855 영국 유한책임법 — 특권이 절차가 되다
- 1883 『한성순보』 「회사설」이 회사를 설명하다
- 1899 대한천일은행 — 조선인만 주식을 사고팔 수 있었다
지금
- 2024 전 세계 상장회사 46,086개, 기관투자자가 47%
회사는 왜 사람보다 오래 살까
지금 우리가 '회사'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 몇 개의 장치를 한데 묶어 놓은 물건이에요. 장치를 하나씩 떼어 보면 각각이 꽤 이상한 발상이라는 게 보여요.
경제사 연구자들이 근대 주식회사를 이루는 특징으로 꼽는 것은 다섯 가지예요.
첫째는 법인격이에요. 회사가 주주와 별개의 존재로 취급돼요. 회사가 계약을 맺고, 회사가 소송을 하고, 회사 이름으로 재산을 가져요. 둘째는 영구자본이에요. 사업이 한 번 끝날 때마다 돈을 나눠 갖고 흩어지는 게 아니라 자본이 회사에 계속 남아요. 셋째는 지분을 남에게 넘길 수 있다는 거예요. 주주가 바뀌어도 회사는 그대로고요. 넷째는 돈을 댄 사람과 일을 하는 사람이 갈린다는 것, 다섯째는 회사가 망해도 주주가 넣은 돈까지만 잃는다는 거예요.
이 다섯이 한 몸에 모인 조직을 두고 경제사 연구자들은 '제도적 돌파구'라고 불러요. 유럽의 두 동인도회사가 그 사례로 자주 꼽히고요. 그런데 이 다섯을 실제로 뜯어본 연구는 다른 결론을 냈어요. 네덜란드 쪽 회사를 다룬 한 논문은 이 회사 형태가 선견지명보다는 설계 결함을 땜질하는 데서 나왔다고 적어요. 결론 문장은 이랬어요. 법적 형식이 경제적 기능을 따라간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었다고요.
그러니까 누가 앉아서 이 다섯 가지를 설계한 게 아니라는 거예요. 문제가 생겼고, 임시로 막았고, 임시가 굳었어요. 그 순서를 따라가는 게 이 이야기예요.
순서를 따라가야 하는 이유가 하나 더 있어요. 다섯 가지가 붙는 순서에 따라 누가 이득을 보고 누가 위험을 지는지가 달라졌거든요. 자본을 묶어 두면 돈을 낸 사람이 발이 묶이고, 지분을 넘길 수 있게 하면 그 발이 다시 풀려요. 회사가 망해도 넣은 돈까지만 잃게 하면 돈을 빌려준 쪽이 그만큼 위험을 더 져요. 장치 하나가 붙을 때마다 무게가 어디론가 옮겨 갔어요. 이 이야기에서 계속 물어야 할 질문이 그거예요. 이 장치가 붙으면서 누구의 위험이 늘었는가.
먼저 물어야 할 게 하나 있어요. 이 다섯 가지가 처음 모인 회사는 어디였을까요. 이 질문에는 답이 하나가 아니에요.
여기서 기억할 것 다섯 가지가 언제 어떤 순서로 붙었는지가 이야기의 뼈대예요. 설계도가 아니라 수리 기록에 가깝습니다.
'최초의 주식회사'는 무엇의 최초일까
이 질문은 무엇의 최초인지를 밝히지 않으면 답이 없어요. 축이 적어도 넷이거든요.
첫째 축은 지분을 나눠 갖고 그 지분을 자유롭게 넘길 수 있으며 회사가 주주와 별개의 법적 존재로 취급되는 조직이에요. 여기서는 프랑스 툴루즈의 방앗간 회사가 앞서요. 가론강 여울목의 방앗간은 1071년 기록에 처음 나오고, 1248년에는 열두 개가 돌아가고 있었어요. 이 방앗간 회사들이 1372년에 합쳐 '오노르 델 바자클'이 됐어요. 지분은 위쇼, 주주는 파리에라 불렸고 처음에는 80주였어요. 연구팀은 이 회사를 기록으로 남은 가장 이른 주식 보유 법인이라 부르면서, 지분이 완전히 양도 가능했고 소유권을 넘길 때 회사의 승인이 필요하지 않았으며 14세기부터 법정이 이 회사를 주주와 별개의 법적 실체로 다뤘다고 적어요. 1384년에는 합병에 끼지 않고 남아 있던 방앗간 두 곳을 새 주식 16주와 맞바꿔 96주가 됐어요. 연구팀은 이걸 이른 시기의 기업 인수 사례라고 불러요.
둘째 축은 국가의 특허장을 받아 법인이 된 무역 회사예요. 여기서는 영국 쪽이 먼저예요. 1600년 12월 31일 헌장은 컴벌랜드 백작과 '그 밖의 215명'을 하나의 법인체로 만들고 승계를 갖게 했어요. 그리고 희망봉 너머부터 마젤란 해협까지의 무역을 15년 동안 이 회사에만 허용했고요. 네덜란드 쪽 회사는 그보다 1년 남짓 뒤예요.
셋째 축이 이 편의 본론이에요. 항해가 끝날 때마다 정산해 흩어지지 않고 자본이 회사에 계속 남은 회사요. 여기서는 네덜란드 쪽이 앞서는데, 그 이유가 좀 이상해요. 넷째 축은 특허장이나 개별 법률 없이 등록만으로 유한책임을 얻는 회사인데, 이건 19세기 영국까지 기다려야 해요.
그러니 수식어 없이 '최초의 주식회사'라고 말하면 그건 네 가지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나로 뭉친 말이 돼요. 셋째 축부터 볼게요.
여기서 기억할 것 '최초'는 축을 정해야 답이 생겨요. 여기서 축을 넷으로 갈라 놓아야 뒤가 헷갈리지 않습니다.
위험을 쪼개는 장치는 그전에도 있었어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만들어지기 전에도 아시아로 배를 보내는 회사들이 있었어요. 국립문서보관소는 이 회사들을 '선행회사'라고 부르는데, 이들이 돈을 모으는 방식은 이랬어요.
한 번의 항해에 필요한 돈을 그때 모아요. 배가 돌아오면 출자자들은 자기가 낸 돈을 이익 몫과 함께 돌려받아요. 다음 항해에 다시 넣을지는 그때 다시 정하고요. 배가 가라앉으면 여럿이 조금씩 나눠 지고, 무사히 돌아오면 여럿이 조금씩 나눠 가져요. 위험을 쪼개는 장치는 여기 이미 있었어요. 오늘날 분산투자라고 부르는 발상과 뿌리가 같아요.
그런데 문제가 있었어요. 이 회사들이 서로 심하게 경쟁하면서 이익률이 깎였고, 그러자 출자자들이 발을 빼려 했어요. 통합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나왔지만 지역끼리 이해가 갈려 잘 되지 않았어요. 결국 통합은 자발적으로 이뤄지지 않았어요. 국립문서보관소는 이렇게 적어요. 정부가 강제했다고요. 공화국은 스페인·포르투갈 국왕과 전쟁 중이었고, 하나로 합친 회사는 그 싸움에서 강력한 군사·경제적 무기가 될 수 있었거든요.
1602년 3월 20일 연방의회가 헌장을 내줬어요. 유효기간은 21년, 희망봉 동쪽과 마젤란 해협 서쪽에서 배를 보내고 무역하는 일은 이 회사만 할 수 있었어요. 그리고 자본에 관해서는 이렇게 적었어요. 앞으로는 한 번의 항해가 아니라 10년을 묶어 돈을 받고, 그 10년 동안 여러 함대를 보내며, 1612년에 출자자들에게 그때까지의 이익과 함께 돈을 돌려주고 다음 10년치를 새로 청약받는다고요. 아시아에서 온 물건을 판 돈이 최초 투자금의 5%에 이르면 곧바로 배당하라는 조항도 있었어요.
그러니까 1602년에 새로웠던 것은 위험을 쪼갠 게 아니에요. 이미 쪼개져 흩어지던 자본을 10년 동안 묶어 둔 것이었어요. 그것도 임시로요.
여기서 기억할 것 널리 도는 설명이 여기서 흔들려요. 새로웠던 쪽은 자본을 나누는 방향이 아니라 묶는 방향입니다.
돌려주기로 한 돈이 돌아오지 않았어요
1612년이 왔어요. 그리고 돈은 돌아오지 않았어요.
헌장을 보관하고 있는 네덜란드 국립문서보관소는 자기 아카이브 목록 서문에 이렇게 적어요. 10년 뒤 자본의 반환은 없었다고요. 최초의 투자금은 회사의 전 생애 동안 그대로 남았다고요. 그리고 한 문장이 더 붙어 있어요. 헌장을 발급한 연방의회가 이사들이 이 조항을 지키지 않는 것을 편들었다고요.
주주들이 가만히 있지는 않았어요. 헌장 갱신이 걸린 1622년 무렵 항의가 크게 일었어요. 배당과 자본 반환 조항이 지켜지지 않는 것, 이사들이 재무에 관해 열린 태도를 보이지 않는 것, 이사들이 회사 돈으로 제 배를 불린다는 의심 때문이었어요. 연방의회는 헌장을 21년 더 연장하면서 작은 양보를 했어요. 국립문서보관소의 표현으로는 실질적인 변화는 이뤄지지 않았고요.
왜 이렇게 됐는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어요. 아시아에 요새를 짓고 상관을 두고 배를 계속 띄우려면 돈이 계속 있어야 했어요. 10년마다 자본을 청산했다가 다시 모으는 구조로는 그 일을 할 수 없었어요. 국립문서보관소는 반환 조항이 '자본의 축적을 불가능하게 만들었고', 그래서 이사들이 이 조항을 지키기보다 어겼다고 적어요.
앞서 본 논문이 '땜질'이라고 부른 게 바로 이런 자리예요. 회사가 사람보다 오래 사는 구조는 누가 발명한 게 아니라, 지켜지지 않은 조항이 그대로 굳어서 생긴 것에 가까워요. 그 뒤로 이 회사는 배당을 현금 대신 다른 걸로 내주기도 했어요. 향신료로 준 적도 있고, 1679년에는 처음으로 아직 만기가 되지 않은 채권으로 지급했어요. 회사가 진 빚을 증서로 만들어 배당 대신 건넨 셈이에요.
여기서 기억할 것 제도가 지켜진 조항이 아니라 지켜지지 않은 조항에서 나오기도 한다는 것 — 이 편에서 가장 무거운 대목입니다.
'남의 돈을 관리하는 사람'이라는 문제
자본이 회사에 묶이자 새로운 문제가 생겼어요. 돈을 낸 사람은 그 돈을 도로 가져올 수 없는데, 그 돈을 쓰는 사람은 따로 있다는 문제요.
1602년 헌장이 정한 구조는 이랬어요. 이사직은 종신이었어요. 새 이사를 뽑는 데 주주는 아무런 영향력이 없었고요. 이사가 장부를 열어 보일 의무는 10년이 지나 첫 결산을 할 때에나 생겼어요. 국립문서보관소는 이사들에게 '의무가 거의 없었고 그 몇 안 되는 의무조차 엄격히 지켜지지 않았다'고 적어요. 주주가 회사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없는 상태, 그러니까 정보 비대칭이 제도에 그대로 들어 있었던 거예요.
보수 구조는 더 눈에 띄어요. 헌장은 이사의 보수를 두 갈래로 정했어요. 배를 꾸리는 데 쓴 비용의 1%, 그리고 돌아온 물건을 판 이익의 1%였어요. 이익만이 아니라 지출에도 보수가 걸려 있었다는 뜻이에요. 많이 쓰면 그만큼 더 받았어요. 손실은 출자자들이 지고 보수는 규모에 따라 붙는 구조를 두고 오늘날에는 도덕적 해이라고 불러요.
안전장치가 아예 없지는 않았어요. 이사는 회사 주식을 일정액 이상 갖고 있어야 했어요. 암스테르담과 제일란트 상회는 6,000길더, 작은 상회들은 3,000길더였고, 이건 일종의 담보로 여겨졌어요. 자기 돈도 걸어 두게 한 거예요. 대신 이사는 회사가 진 빚에 개인적으로 책임지지 않았어요.
땜질은 그 뒤에 붙었어요. 1623년에 주요 주주들로 세 종류의 위원회가 만들어졌어요. 하나는 회계검사인으로, 첫 헌장이 끝난 1622년에 처음 제출된 총계정을 검사했어요. 또 하나는 이사 자리가 비면 소집돼 이사들과 함께 3인 후보명단을 만들었고, 아홉 명은 17인 이사회 회의에 참석해 권고할 수 있게 됐어요. 이사 임기도 3년으로 정해졌는데 곧 지켜지지 않아 대개 죽을 때까지 자리를 지켰고요. 1647년에는 1% 보수 규정 자체가 없어지고 고정 급여로 바뀌었어요. 암스테르담 상회 이사가 연 3,100길더, 제일란트가 2,600길더, 작은 상회들이 1,200길더였어요.
경영자의 보수를 무엇에 걸어 둘 것인가. 400년 전에도 답을 찾느라 두 번을 고쳤어요.
여기서 기억할 것 돈을 낸 사람과 쓰는 사람이 갈리면 생기는 문제들이 여기서 한꺼번에 등장해요. 뒤에 나오는 제도는 대개 그 대응책입니다.
말할 수 없으면 팔 수 있게
주주가 이사를 뽑을 수도 장부를 볼 수도 없었다면, 주주에게 남은 힘은 무엇이었을까요. 하나 있었어요. 나가는 힘이요.
이 회사의 지분은 악티라고 불렸어요. 액면가가 정해져 있지 않았고, 국립문서보관소의 표현으로 언제나 양도할 수 있었어요. 팔거나 교환하거나 담보로 잡힐 수 있었고요. 넘길 때는 장부담당자 앞에서 이사 한두 명이 함께 서명해 이전 증서를 만들었어요. 회사에 대고 말하는 대신 시장에 대고 파는 것 — 주주가 가진 첫 번째 권리는 이쪽이었어요.
누가 이 지분을 샀는지는 실제 장부가 말해 줘요. 1602년 8월 암스테르담 상회의 자본 등록부가 국립문서보관소 사료함에 공개돼 있는데, 거기에는 최대 출자자 이사크 르 메르의 8만 5,000길더가 있고, 같은 장부에 시장 하녀 흐리트헨 데르크스의 60길더가 있어요. 직업이 '하녀'로 적힌 사람들의 이름도 보이고요. 헌장은 공화국에 사는 사람이면 누구나 돈을 넣을 수 있게 했고 금액에 제한을 두지 않았어요.
거래는 곧 활발해졌어요. 얼마나 활발했는지는 규제가 먼저 말해 줘요. 1610년 연방의회는 자기가 실제로 갖고 있지 않은 주식을 파는 것을 금지했어요. 국립문서보관소는 이것을 세계 최초의 주식 거래에 대한 국가 개입이라고 적어요. 이듬해인 1611년에는 암스테르담에 증권거래소가 세워졌고요.
이 시기의 종이 한 장이 지금도 남아 있어요. 1606년 9월 9일, 엔크하위전 상회의 피터르 하르먼스존이 마지막 할부금 150길더를 냈다는 영수증이에요. 지금 확인된 것 가운데 가장 오래된 주식이고, 2010년에 위트레흐트대 학생 뤼번 스할크가 서프리스 아카이브에서 논문 자료를 찾다 발견했어요. 종이 안쪽에는 1650년까지 받은 배당이 적혀 있어요. 배당금이 얼마인지는 17인 이사회가 해마다 또는 몇 해마다 정했고, 향신료로 준 해도 있었어요.
돈을 낸 사람은 오래전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 사람이 받은 배당의 기록이 종이에 남아 지금 아카이브에 있어요. 회사가 사람보다 오래 산다는 말이 어떤 모습인지 이 종이 한 장이 보여줘요.
여기서 기억할 것 발언권 대신 퇴출권. 주주의 힘이 어느 쪽에 있었는지가 뒤의 제도 논쟁으로 이어집니다.
특허장이 함께 넘긴 것
여기서 이 이야기의 가장 무거운 대목으로 갑니다. 무역 회사가 어떻게 통치의 권한을 갖게 됐는가예요.
답은 지분의 구조가 아니라 문서에 있어요. 1602년 헌장은 회사에 아시아에서 요새를 지을 권한, 병사를 고용할 권한, 아시아 통치자와 조약을 맺을 권한, 재판관을 임명할 권한을 주었어요. 다만 이 권한들이 어떻게 쓰일지는 헌장에 적혀 있지 않았어요. 국립문서보관소는 1602년 시점에는 회사의 해외 권한이 어떻게 커질지 내다보는 것이 아직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적어요. 1600년 영국 헌장도 같은 종류의 배타적 권리를 담고 있었고요. 권한의 출처는 지분을 나눠 가진 형식이 아니라 국가의 위임이었어요.
권한은 곧 조직이 됐어요. 1609년 이사들은 아시아의 최고 지휘권을 총독에게 맡기기로 하고 인도 평의회를 두었어요. 1619년에는 자바의 항구도시 자카트라 자리에, 국립문서보관소의 표현으로 '많은 전투 끝에' 바타비아가 세워져 총독과 평의회의 본거지가 됐어요.
그다음에 일어난 일은 숫자로 적을게요. 서프리스 박물관 기록으로 1621년 반다 제도에서 4월 말 1,200명이 섬 밖으로 실려 나갔고 그중 약 800명이 바타비아로 이송됐어요. 5월 8일에는 심문에서 살아남은 오랑 카야, 그러니까 세습 수장 44명이 모두 유죄로 처리되어 처형됐어요. 7월 중순까지 포로가 된 사람은 476명이었고, 당대의 추정으로는 약 2,500명이 굶주림과 결핍으로 죽었어요. 수천 명이 섬을 빠져나간 것으로 보이고 적어도 1,500명이 세람섬 남쪽 해안에 닿았어요. 총독이 노린 것은 이 향신료의 완전한 독점이었어요.
국립문서보관소는 1622년 반다 제도 정복으로 회사가 육두구와 메이스의 독점을 얻었다고 적어요. 정향은 더 걸렸어요. 회사는 몰루카 여러 섬의 정향나무를 뽑아 없애 재배를 암본에 몰았고, 1667년 마카사르가 함락되면서 회사 밖에서 정향을 살 수 있던 마지막 항구가 손에 들어왔어요. 그 사이 1602년부터 1700년까지 이 회사의 배를 타고 유럽을 떠난 사람은 31만 7,000명이었어요.
같은 시기에, 같은 다섯 가지를 갖춘 다른 회사가 하나 더 있었어요. 툴루즈의 방앗간 회사요. 지분이 완전히 양도되고 법정이 주주와 별개의 실체로 다뤘던 그 회사는 밀을 빻았어요. 차이를 만든 것은 회사의 형식이 아니라 헌장에 무엇이 적혀 있었느냐였어요.
여기서 기억할 것 인과를 형식이 아니라 위임에서 찾아야 하는 자리예요. 같은 형식이 다른 곳에서는 방앗간을 돌렸습니다.
거품 뒤에 만든 금지법은 얼마나 작동했을까
무대를 영국으로 옮길게요. 이쪽에서는 회사가 국채와 얽히면서 이야기가 달라져요.
잉글랜드은행은 자기 연혁에서 1711년에 남해회사가 세워졌고 그것이 '정부의 은행이자 국채의 보유자라는 잉글랜드은행의 지위를 위협했다'고 적어요. 그리고 1720년에 이 회사가 국채의 일부를 넘겨받으면서 주가가 크게 올랐다고 적고요. 같은 연혁의 다음 문장은 이래요. 주식에 대한 투자 광풍이 일었지만 결국 값이 무너졌고 수천 명이 파산했다고요. 나중에 경제 버블을 이야기할 때 거의 빠지지 않고 불려 나오는 장면이에요.
그해에 이른바 거품법이 만들어졌어요. 국왕의 특허장을 받지 않은 합자회사를 세우지 못하게 하는 법이었어요. 흔히 이 법이 영국의 회사 제도를 한 세기 동안 얼려 놓았다고들 해요. 그런데 이 법을 없애던 자리의 기록을 보면 결이 조금 달라요.
1825년 6월 2일 영국 하원에서 폐지가 논의됐어요. 법무장관은 이 법의 뜻이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이었고 입법자의 의도를 확인하는 일이 불가능했다고 말했어요. 그리고 1720년에 만들어진 뒤로 사실상 사문이 되어 있었다며, 10~12년 전까지 이 법에 따른 소추가 없었다고 했어요. 허스키슨 의원은 상업의 이익이 합자회사에 대한 적절한 장려와 보호를 요구한다고 말했고요. 한 대학 연구도 이 법에 따른 기소가 거의 없었다는 점을 들어 억제 효과가 과장돼 왔다고 봐요. 다만 특허장이 없으면 자유롭게 유통되는 주식 시장을 쓰기 어려웠다는 제약 자체는 있었어요.
금지가 느슨하던 그 시기에, 문제를 정확히 이름 붙인 사람이 나왔어요. 1776년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주식회사의 이사를 두고 '자기 돈이 아니라 남의 돈을 관리하는 사람들'이라고 적었어요. 그래서 자기 돈을 지키는 동업자만큼 조마조마하게 지켜볼 것이라 기대하기 어렵고, 부잣집 집사처럼 작은 일에 신경 쓰는 것을 주인의 명예에 맞지 않는다며 넘겨 버린다고요. 이어진 문장이 '태만과 낭비는 그런 회사의 경영에서 언제나 어느 정도는 나타날 수밖에 없다'였어요. 같은 대목에서 그는 주주 대부분이 회사 일을 이해하려 들지 않고 이사들이 정해 주는 배당을 그저 받는다고도 적었어요.
그리고 한 문장을 더 남겼어요. 주식회사에서는 각 참여자가 자기 지분의 범위까지만 책임을 진다고요. 이 문장이 다음 챕터의 출발점이에요.
여기서 기억할 것 금지의 효과를 과장하지 않는 자리이자, 이 이야기의 핵심 문제에 이름이 붙은 자리입니다.
유한책임에 반대한 사람들에게도 이유가 있었어요
애덤 스미스가 1776년에 적었듯이, 유한책임 자체는 19세기의 발명이 아니에요. 1602년 헌장도 이사가 회사의 빚에 개인적으로 책임지지 않는다고 적었고요. 19세기 영국에서 달라진 것은 그것을 얻는 방법이었어요.
그전에는 국왕의 특허장이나 개별 법률이 있어야 했어요. 1844년에 합자회사법이 만들어져 일정 요건 아래 회사 설립을 합법화하고 등기소를 두었지만, 1856년 의회 논의에는 그 절차가 완전히 쓸모없는 것으로 드러났다는 회고가 남아 있어요. 가등록 회사의 증서도 본등록 회사의 것만큼 실제로 유통됐거든요.
1855년 여름, 유한책임법을 두고 영국 의회에서 격론이 벌어졌어요. 반대 쪽 이야기부터 볼게요. 스트럿 의원은 이 법이 손실의 가능성은 제한되고 이익의 가능성은 제한되지 않은 채로 장사에 뛰어들게 한다고 했어요. 지금 말로 옮기면 도덕적 해이를 한 문장으로 짚은 거예요. 스푸너 의원은 경솔하고 부정직한 투기로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덫이자 기만이라고 했고요. 상원에서 세인트레너즈 경은 10파운드짜리 주식에 20%만 납입하면 250~300파운드밖에 안 되는 자본으로도 1만 개 회사를 세울 수 있다며, 그럴듯한 사업설명서로 사람들의 저축을 끌어모으는 회사들을 걱정했어요.
가장 실무적인 반대는 카드웰 의원 쪽이었어요. 주주가 아직 내지 않은 주금, 그러니까 나중에 회사가 청구할 수 있는 미납입 잔액이야말로 회사에 돈을 빌려준 쪽을 지키는 안전장치라는 거예요. 회사가 갚지 못하면 그 잔액을 걷어 채권자에게 줄 수 있으니까요. 유한책임을 넓히면 그 장치가 얇아진다는 지적이었어요. 실제로 회사에 돈을 빌려주고 채권을 들고 있는 쪽에서는 무시할 수 없는 문제였고요.
찬성 쪽도 한 줄로 요약돼요. 볼 의원은 적은 자본을 가진 개인은 혼자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지만 그 적은 돈들을 합치면 큰 자본이 만들어진다고 했어요. 상원에서 그랜빌 백작은 상거래계를 계속 불확실한 상태에 두면 안 된다고 했고요.
법은 통과됐어요. 이듬해 의회 기록에 남은 요약으로는 25명의 동업자가 자본의 4분의 3을 보유하고 각자 20%를 납입해 증서를 작성하면 유한책임을 붙인 등록 증명서를 받을 수 있게 하는 내용이었어요. 1856년에는 합자회사법이 다시 만들어져 실질적 가치가 없던 예비 절차를 걷어냈고요. 특권이던 것이 절차가 된 거예요. 반대했던 사람들이 걱정한 문제가 사라진 것은 아니고, 그 문제는 지금도 회사법의 주제예요.
여기서 기억할 것 밀려난 쪽의 이유를 적는 자리예요. 채권자를 누가 지킬 것인가라는 물음은 그때 답이 나지 않았습니다.
한국에는 다른 문으로 들어왔어요
이 제도가 한국에 들어온 경로는 또 달라요. 배도 특허장도 아니고 번역이었어요.
1883년 조선에서 회사 설립을 촉구하는 글들이 나왔어요. 유길준의 「상회규칙」은 모두 25조로 주식의 발행과 출자, 사장 선출 방법, 주주 총회, 본사의 기구와 지사 설치를 다뤘고, 회사 역원 선출과 대차대조표 공개, 이윤의 분배까지 규정했어요. 같은 해 10월 21일자 『한성순보』의 「회사설」은 회사를 이렇게 설명했어요. 여러 사람의 자본을 모아 몇 사람에 위탁하여 농공상의 사무를 맡아 처리하는 것이라고요. 소유와 경영의 분리를 한국어로 옮겨 놓은 한 문장이에요.
실제로 세워지기도 했어요. 1883년 원산에 상회소, 1885년 인천에 상회, 1890년 부산에 상법 회사가 생겼고, 갑오개혁 때까지 문헌에 나타나는 상회사는 40여 개예요. 다만 우리역사넷은 이 회사들에 대해 조심스러운 평가를 붙여요. 도고와 질적인 면에서 차이가 없었던 셈이고 일종의 동업 조합적인 성격이었다고요. 몇몇 큰 상인이 회사를 세우고 군소 상인에게 출자하게 하되, 출자하지 않은 상인의 상행위를 막고 해당 상품을 독점적으로 사들이는 방식이었거든요. 형식은 회사였고 실질은 독점 조합이었던 거예요.
1899년에는 대한천일은행이 세워졌어요. 우리역사넷은 1월 29일 34명의 발기인 총회로 출범했다고 적고, 국가기록원은 1월 30일 상인층이 중심이 되어 설립된 주식회사라고 적어요. 공칭자본금은 5만 6,000원이었고 112금으로 나눠 1금이 500원이었어요. 주당 금액이 다른 은행의 열 배라 주주가 될 수 있는 사람이 사실상 제한됐고요. 국가기록원은 고종황제가 창립자금의 54%를 지원했고 황태자인 영친왕이 1대 주주로 기록돼 있다고 적어요.
이 은행의 정관에는 눈에 띄는 조항이 하나 있었어요. 조선인 외에는 주식매매를 할 수 없다는 제한이었어요. 지분의 자유로운 유통이 이 제도의 핵심 장치인데, 여기서는 그 유통을 국적으로 막아 두었어요. 밖에서 들어오는 자본을 경계한 결과였죠. 그 뒤 1909년 자본금을 15만 원에서 50만 원으로 늘리면서 탁지부가 최대주주가 됐고, 1912년 2월 11일 조선상업은행으로 이름이 바뀌었어요. 1924년 조선실업은행과 합병했고, 1950년 한국상업은행, 1999년 한빛은행을 거쳐 2002년에 지금의 이름이 됐어요. 주인도 이름도 여러 번 바뀌었는데 법인은 이어졌어요.
1855년 영국 의회에서 채권자 보호를 이유로 반대에 부딪혔던 그 원칙은 지금 한국 상법 제331조에 한 문장으로 들어 있어요. 주주의 책임은 그가 가진 주식의 인수가액을 한도로 한다고요. 법제처 설명으로는 회사가 갚아야 할 돈이 가진 것보다 많아도 주주가 회사의 채권자에게 대신 갚을 책임은 없어요.
여기서 기억할 것 제도는 옮겨 심는다고 그대로 자라지 않아요. 형식과 실질이 갈리는 자리를 보는 것이 이 챕터의 몫입니다.
무엇을 보고 있으면 될까
앞일을 맞히려 들 필요는 없어요. 대신 이 이야기가 알려 준 것에 비춰, 무엇을 보고 있으면 판이 움직이는 걸 먼저 알아챌 수 있는지만 정리해 볼게요.
먼저 지금의 크기부터요. OECD 집계로 2024년 12월 말 전 세계 상장회사는 46,086개, 시가총액을 합치면 124조 5,360억 달러이고 GDP 대비 112.7%예요. 한국은 2,499개에 1조 5,510억 달러, GDP 대비 82.9%이고 2021년 12월보다 회사 수가 6% 늘었어요. 같은 기관의 요약 자료는 2005년 이후 전 세계에서 3만 5,000개 회사가 상장을 떠났다고 적어요. 들어오는 회사와 나가는 회사가 함께 있어요.
첫째로 볼 것은 주식을 누가 갖고 있는가예요. 같은 집계로 전 세계 상장주식의 47%는 기관투자자 몫이에요. 400년 전 장부에 60길더를 적은 하녀가 있었다면, 지금 주식의 절반 가까이는 남의 돈을 맡아 굴리는 조직이 갖고 있어요. 소유와 경영 사이에 한 겹이 더 생긴 셈이에요. 한국은 배열이 달라요. 기관투자자가 17%이고, 대신 다른 기업이 가진 몫이 27%로 세계 평균 9%보다 커요. 나라마다 주주의 얼굴이 다르면 감시 방식도 달라져요.
둘째는 주주가 쓸 수 있는 힘이 어느 쪽인가예요. 이 이야기 내내 주주에게는 두 가지 길이 있었어요. 회사 안에서 말하는 길과 지분을 팔고 나가는 길이요. 1602년에는 뒤쪽만 열려 있었고, 1623년에 앞쪽이 조금 열렸어요. 지금도 제도가 바뀔 때는 대체로 이 둘 중 어느 쪽 문을 넓히느냐의 문제예요.
셋째는 회사가 회사 아닌 것들과 어떻게 얽히는가예요. 남해회사는 국채와 얽히면서 판이 커졌고, 이 이야기에서 회사의 자리를 바꾼 것들은 대체로 회사 바깥에 있었어요. 전쟁 중인 정부의 필요, 어느 항구를 누가 쥐느냐, 채권자를 누가 지키느냐에 관한 법, 그리고 번역된 한 문장 같은 것들이요.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요. 1372년 툴루즈에서 방앗간들이 합쳐 만든 회사는 1888년 화재를 겪은 뒤 수력발전 회사로 업종을 바꾸고 1910년에 다른 회사와 합병해 파리 증권거래소에 상장됐다가, 1946년 프랑스의 다른 전력 회사들과 함께 국유화되면서 끝났어요. 574년이었어요. 그 사이 주주는 수없이 바뀌었고 업종도 바뀌었는데 회사는 이어졌어요. 연구팀이 모은 자료로는 327개 연도의 배당수익률을 계산할 수 있었고 평균은 연 5% 안팎, 장기 실질 주가 상승은 0에 가까웠어요. 밀을 빻아 나눠 갖는 일이 574년 동안 이어졌다는 기록이에요.
같은 장치가 어디서는 방앗간을 돌렸고 어디서는 섬 하나의 인구를 바꿨어요. 그 차이가 어디서 왔는지를 이 이야기 내내 봤고요. 다음번에 이 제도를 바꿀 것도 아마 회사에 관한 뉴스가 아닌 곳에 있을 거예요. 어디일지는 지켜볼 만해요.
여기서 기억할 것 예측이 아니라 관전법이에요. 누가 갖고 있는지, 어느 문이 열리는지, 회사 바깥에서 무엇이 움직이는지 — 세 곳만 보면 됩니다.
흔한 오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세계 최초의 주식회사다.
무엇의 최초인지에 따라 답이 달라져요. 국가 특허장으로 법인이 되고 승계를 얻은 무역 회사로는 1600년 12월 31일의 영국 동인도회사가 앞서요. 지분을 나눠 갖고 그 지분이 회사의 승인 없이 넘어가며 법정이 회사를 주주와 별개의 실체로 다룬 조직으로는 1372년 툴루즈의 방앗간 회사가 훨씬 앞서고요. 네덜란드 쪽이 가장 이른 것은 '항해가 끝나도 자본이 계속 남은 회사'라는 축인데, 그것도 설계가 아니라 결과였어요.
주식회사는 항해의 위험을 여럿이 나눠 지려고 만들어졌다.
위험을 나눠 지는 장치는 그 전에 있었어요. 네덜란드 국립문서보관소는 이전의 선행회사들이 한 번의 항해마다 자본을 모았고 배가 돌아올 때마다 출자자들이 낸 돈을 이익 몫과 함께 돌려받았다고 적어요. 1602년 헌장이 한 일은 그 반환 주기를 10년으로 늘린 것이었고, 실제로는 그 반환조차 이뤄지지 않았어요. 쪼개는 쪽이 아니라 묶는 쪽이 새로웠어요.
자본이 회사에 계속 남는 구조는 1602년 헌장이 설계한 것이다.
헌장은 1612년에 출자자에게 이익과 함께 돈을 돌려주고 다음 10년치를 새로 청약하게 되어 있었어요. 네덜란드 국립문서보관소는 '10년 뒤 자본의 반환은 없었다. 최초의 투자금은 회사의 전 생애 동안 그대로 남았다. 헌장을 발급한 연방의회는 이사들이 이 조항을 지키지 않는 것을 편들었다'고 적어요.
유한책임은 1855년 영국에서 처음 생겼다.
1602년 헌장도 이사가 회사의 빚에 개인적으로 책임지지 않는다고 적었고, 애덤 스미스는 1776년에 주식회사에서는 각 참여자가 자기 지분의 범위까지만 책임을 진다고 썼어요. 1855년에 달라진 것은 그것을 얻는 방법이에요. 그전에는 국왕의 특허장이나 개별 법률이 필요했는데, 이제 요건을 갖춰 등록하면 됐어요.
1720년 거품법이 영국의 주식회사를 한 세기 동안 얼려 놓았다.
1825년 폐지를 논의하던 영국 하원에서 법무장관은 이 법의 뜻이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이었고 1720년 이후 사실상 사문이 되어 있었다며 10~12년 전까지 소추가 없었다고 말했어요. 한 대학 연구도 이 법에 따른 기소가 거의 없었다는 점을 들어 억제 효과가 과장돼 왔다고 봐요. 다만 특허장 없이는 자유롭게 유통되는 주식 시장을 쓰기 어려웠다는 제약 자체는 있었어요.
주식회사라는 형식 때문에 무역 회사들이 식민지를 갖게 됐다.
권한은 형식이 아니라 특허장에서 왔어요. 1602년 네덜란드 헌장은 회사가 아시아에서 요새를 짓고 병사를 고용하고 통치자와 조약을 맺고 재판관을 임명할 수 있게 했어요. 그리고 그 통합 자체를 정부가 강제했고요. 스페인·포르투갈과 전쟁 중이던 공화국에 하나로 합친 회사는 강력한 군사·경제적 무기였거든요. 같은 시대에 지분과 법인격을 모두 갖췄던 툴루즈의 방앗간 회사는 밀을 빻았어요.
소유와 경영의 분리는 20세기 대기업에서 시작됐다.
1602년 헌장부터 이사직은 종신이었고 주주는 이사 선임에 아무 영향력이 없었으며 장부는 10년 뒤에나 열렸어요. 애덤 스미스는 1776년에 이 문제를 '남의 돈을 관리하는 사람'이라는 말로 적었고요. 베를과 민스가 1932년에 경영자 지배로 분류한 회사도 미국 200대 기업의 44%로 과반은 아니었고, 에릭 힐트의 연구는 1820년대 미국 회사들에서도 소유와 경영이 흔히 갈려 있었다고 봐요.
그래서 한마디로
'최초의 주식회사'는 무엇의 최초인지를 밝히지 않으면 답이 없어요. 지분을 나눠 갖고 자유롭게 넘기며 법정이 주주와 별개로 다룬 조직은 1372년 툴루즈의 방앗간 회사에 있었고, 국가 특허장으로 법인이 된 무역 회사로는 1600년의 영국 동인도회사가 앞서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가장 이른 것은 항해가 끝나도 자본이 남는 구조인데, 그건 설계가 아니었어요. 1602년 헌장은 1612년에 출자자에게 돈을 돌려주게 되어 있었고, 네덜란드 국립문서보관소는 그 반환이 없었으며 헌장을 발급한 연방의회가 이사들 편을 들었다고 적어요. 자본이 묶이자 돈을 낸 사람과 쓰는 사람이 갈리는 문제가 따라왔고, 1623년의 주주 위원회와 1647년의 보수 개편이 그 땜질이었어요. 회사가 통치의 권한을 갖게 된 것은 지분의 형식 때문이 아니라 헌장이 요새와 병사와 조약을 함께 넘겼기 때문이고, 같은 형식으로 툴루즈의 회사는 574년 동안 밀을 빻았어요. 유한책임을 등록만으로 얻게 한 1855년 영국 법은 채권자를 누가 지키느냐는 반대에 부딪혔고, 그 물음은 지금도 남아 있어요.
참고 자료
본문의 연도와 숫자는 아래 자료를 근거로 씁니다. 틀린 곳을 찾으시면 알려주세요.
-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 아카이브 1.04.02 목록 서문 Nationaal Archief (네덜란드 국립문서보관소) 1602년 3월 20일 헌장과 21년 유효기간, 통합을 정부가 강제했다는 서술, 선행회사의 항해별 출자와 반환, 10년 뒤 자본 반환이 없었고 연방의회가 이사들을 편들었다는 서술, 이사의 종신직·보수 1%·1647년 고정 급여, 1623년 주주 위원회, 악티의 양도 가능성, 헌장이 준 요새·병사·조약·재판관 권한, 1609년 총독직과 1619년 바타비아, 1622년 반다 정복과 1667년 마카사르, 승선자 수
- 사료함 「VOC 주식 (1602)」 Nationaal Archief (네덜란드 국립문서보관소) 1602년 8월 암스테르담 상회 자본 등록부의 실제 기재 — 이사크 르 메르 8만 5,000길더, 하녀 흐리트헨 데르크스 60길더. 1610년 갖고 있지 않은 주식의 매도 금지와 1611년 암스테르담 증권거래소
-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주식 (소장품 설명) Westfries Archief (네덜란드 서프리스 아카이브) 1606년 9월 9일 엔크하위전 상회 피터르 하르먼스존의 마지막 할부금 150길더 영수증, 안쪽에 적힌 1650년까지의 배당 기록, 2010년 발견 경위
- The Formative Years of the Modern Corporation: The Dutch East India Company VOC, 1602–1623 Oscar Gelderblom·Abe de Jong·Joost Jonker, 『Journal of Economic History』 73권 4호(2013) 이 회사 형태가 '선견지명보다는 설계 결함을 땜질하는 데서 나왔다'는 것과 '법적 형식이 경제적 기능을 따라간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었다'는 결론
- A Collection of Charters and Statutes relating to the East India Company — 1600년 헌장 영국 동인도회사 헌장·법령 인쇄본 전사 (Wikisource) 1600년 12월 31일, 컴벌랜드 백작과 '그 밖의 215명'을 하나의 법인체로 만들고 승계를 갖게 한 것, 희망봉 너머부터 마젤란 해협까지 15년 독점
- The Present Value Relation Over Six Centuries: The Case of the Bazacle Company David le Bris·William N. Goetzmann·Sébastien Pouget (툴루즈경제대·예일대) 1372년 설립부터 1946년 국유화까지의 주가·배당 자료, 지분이 완전히 양도 가능했고 14세기부터 법정이 회사를 주주와 별개의 실체로 다뤘다는 서술, 327개 연도의 평균 배당수익률 연 5%. 원사료는 오트가론 도립문서고
- 애덤 스미스 『국부론』 제5편 1장 — 주식회사에 관한 대목 (1776) Marxists Internet Archive (공개 전사본) '자기 돈이 아니라 남의 돈을 관리하는 사람들', '태만과 낭비는 그런 회사의 경영에서 언제나 어느 정도는 나타날 수밖에 없다', '주식회사에서는 각 참여자가 자기 지분의 범위까지만 책임을 진다'
- 유한책임법안 — 하원 회의록 (1855년 7월 26일) UK Parliament, Historic Hansard 스트럿 의원의 '손실의 가능성은 제한되고 이익의 가능성은 제한되지 않는다'는 반대, 스푸너 의원의 '덫이자 기만', 볼 의원의 '적은 돈을 합치면 큰 자본이 된다'는 찬성
- 유한책임법안 — 하원 회의록 (1855년 7월 30일) UK Parliament, Historic Hansard 카드웰 의원이 미납입 잔액을 채권자의 안전장치로 든 것과 그에 대한 반론
- 유한책임법안 — 상원 회의록 (1855년 8월 7일) UK Parliament, Historic Hansard 세인트레너즈 경의 '10파운드 주식에 20% 납입이면 250~300파운드로 1만 개 회사' 경고, 그랜빌 백작의 '상거래계를 불확실한 상태에 두면 안 된다'
- 합자회사법안 — 상원 회의록 (1856년 6월 16일) UK Parliament, Historic Hansard 1844년 법의 가등록·본등록 절차가 쓸모없는 것으로 드러났다는 회고, 유한책임법의 요건(25인·자본의 4분의 3·각 20% 납입) 요약
- 거품법 폐지 — 하원 회의록 (1825년 6월 2일) UK Parliament, Historic Hansard 법무장관이 이 법을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이자 '사실상 사문'이라 하고 10~12년 전까지 소추가 없었다고 한 것, 허스키슨 의원의 발언
- A Shackled Revolution? The Bubble Act and Financial Regulation in 18th Century England William McColloch, University of Utah Department of Economics Working Paper 2013-06 거품법에 따른 기소가 거의 없었다는 점을 들어 그 억제 효과가 과장돼 왔다고 보는 논지
- History (기관 연혁) Bank of England (잉글랜드은행) 1711년 남해회사 설립이 잉글랜드은행의 지위를 위협했다는 것, 1720년 국채 이관과 주가 급등, 값이 무너져 수천 명이 파산했다는 서술
- When did Ownership Separate from Control? (NBER Working Paper 13093) Eric Hilt (Wellesley College·NBER), 2007 베를과 민스가 경영자 지배로 분류한 회사가 미국 200대 기업의 44%였다는 것, 1820년대 미국 회사에서도 소유와 경영이 흔히 갈려 있었다는 분석
- OECD Corporate Governance Factbook 2025 — 한국 국가노트 OECD 2024년 12월 말 기준 세계 46,086개·124조 5,360억 달러·GDP 대비 112.7%, 한국 2,499개·1조 5,510억 달러·82.9%, 투자자 유형별 소유 구조(세계 기관투자자 47% / 한국 17%·기업 27%)
- 상회사의 설립 (한국문화사) 우리역사넷 — 국사편찬위원회 유길준 「상회규칙」 25조의 내용, 1883년 10월 21일자 『한성순보』 「회사설」, 1883·1885·1890년의 상회사와 40여 개라는 집계, 이 회사들이 동업 조합적 성격이었다는 평가
- 대한천일은행 1899 (사진으로 보는 한국사) 우리역사넷 — 국사편찬위원회 1899년 1월 29일 발기인 총회, 공칭자본금 5만 6,000원과 112금·1금 500원, 1909년 탁지부의 최대주주 전환과 그 뒤 이름의 계보
- 국가지정기록물 제11호 — 대한천일은행 창립 및 회계 관련 기록물 국가기록원 1899년 1월 30일 설립된 주식회사라는 서술, 고종황제의 창립자금 54% 지원과 영친왕이 1대 주주로 기록된 것, 정관의 '조선인 외에 주식매매를 할 수 없다'는 제한
- 주식회사의 개념 — 주주의 유한책임 (상법 제331조) 찾기쉬운 생활법령정보 — 법제처 주주의 책임이 인수가액을 한도로 한다는 원칙과, 회사가 채무초과 상태라도 주주가 회사의 채권자에게 변제할 책임이 없다는 설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