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의점에서 음료를 하나 집어 뒷면을 보면 당류가 몇 그램이라고 적힌 줄이 있어요. 세계보건기구(WHO)는 유리당 섭취를 총 에너지 섭취량의 10% 미만으로 줄이라고 권고했고, WHO 집계로 설탕 든 음료에 세금을 매기는 나라는 116개국이에요.
값은 흔해요. 설탕은 마트에서 가장 싼 축에 드는 식재료고, 세계 생산량은 2026/27 작물연도에 원당 기준 1억 8,490만 톤에 이를 것으로 미국 농무부는 내다봐요. 흔하고, 싸고, 이제는 줄이라는 권고와 세금이 함께 붙는 물질이에요.
그런데 유럽에서 설탕이 처음 놓였던 자리는 식탁이 아니었어요. 약방 선반이었어요.
한눈에 보는 연표
아시아
- 600년경 페르시아에서 사탕수수 즙으로 설탕을 뽑는 법이 자리 잡다
약과 사치품
- 1100년대 이슬람 의학의 설탕 물약이 비잔티움 진료로 넘어가다
- 1500년대 잉글랜드에서 설탕이 지위의 상징이 되다
플랜테이션
- 1501~1866년 대서양 노예무역 — 승선 약 1,250만 명, 도착 약 1,080만 명
- 1733년 영국 당밀법, 외국산 당밀에 갤런당 6펜스
- 1764년 설탕법 — 세율을 낮추고 단속을 강화하다
- 1791년 생도맹그에서 봉기가 시작되다
사탕무와 값의 붕괴
- 1801년 아하르트, 세계 최초의 사탕무 설탕 공장
- 1846년 리유의 다중효용 증발관 특허, 영국은 설탕관세법
- 1874년 영국이 설탕 관세를 완전히 없애다
- 1881~1883년 사탕무 설탕이 사탕수수를 처음 앞지르다
- 1902년 브뤼셀 협약, 수출 장려금을 서로 막기로 하다
지금
- 2015년 WHO, 유리당 섭취 권고를 내다
- 2026년 116개국이 설탕 음료에 과세, 세계 생산은 1억 8,490만 톤 전망
왜 설탕은 이렇게 여러 얼굴을 갖게 됐을까
사탕수수와 사탕무는 닮은 데가 거의 없어요. 하나는 사람 키를 훌쩍 넘기는 열대의 큰 풀이고, 하나는 온대의 밭에서 자라는 허옇고 뭉툭한 뿌리채소예요. 그런데 이 둘은 몸속에 같은 물질을 쌓아 둬요. 자당이에요. 그래서 어느 쪽에서 뽑든 정제를 마치고 나면 구분이 안 되는 같은 결정이 나와요.
이 한 가지 사실이 이 이야기의 뼈대예요. 설탕이 열대에서만 나던 세상과, 유럽 한복판의 밭에서도 나오게 된 세상은 완전히 다른 곳이거든요. 앞의 세상에서 설탕은 바다를 건너오는 귀한 물건이었어요. 뒤의 세상에서 설탕은 공장에서 찍어 내는 흔한 물건이었고요. 그 사이에 값이 무너졌고, 값이 무너지자 먹는 양이 자릿수 단위로 뛰었어요.
그런데 이 물건의 값을 움직인 것은 농사와 기술만이 아니었어요. 관세, 특혜, 수출 장려금, 수입 쿼터 같은 제도가 여러 차례 값을 흔들었어요. 설탕의 역사는 상당 부분 세법의 역사예요. 앞으로 나올 장면의 절반쯤이 밭이 아니라 의회와 조약 회의장에서 벌어져요. 어느 섬이 무엇을 심을지, 어느 나라가 정제 공장을 가질지가 기후만큼이나 법으로 정해졌거든요.
이야기는 네 번 모양을 바꿔요. 약방의 물건에서 왕실의 사치품으로, 사치품에서 대서양 규모의 농장 작물로, 농장 작물에서 값이 무너진 흔한 상품으로. 그리고 지금은 국제기구가 섭취 상한을 권고하고 116개국이 세금을 매기는 대상이에요. 한 물질이 이렇게 여러 번 자리를 옮긴 경우는 흔치 않아요.
그럼 첫 자리부터 확인하고 갈게요. 널리 회자되는 "설탕은 원래 약이었다"는 말이 어디까지 맞는지부터요. 이 이야기에서 가장 자주 인용되면서 가장 자주 뭉뚱그려지는 대목이거든요.
여기서 기억할 것 이 물건의 값과 자리를 여러 번 바꾼 것은 기술만이 아니라 제도였어요. 그 규칙을 먼저 알아야 뒤의 장면이 보입니다.
"설탕은 원래 약이었다"는 어디까지 맞을까
이 말은 절반쯤 맞아요. 그리고 어긋나는 절반이 더 재미있어요.
확인되는 것부터 볼게요. 사탕수수는 뉴기니 쪽에서 인도와 페르시아로 퍼졌고, 600년경 페르시아에서 즙으로 설탕을 뽑아내는 방법이 자리 잡았다고 설탕 업계의 연혁 자료는 적어요. 그다음이 중요해요. 이슬람 세계의 의학이 설탕을 바탕으로 한 물약과 시럽을 체계로 만들었고, 그 처방이 아랍어에서 그리스어로 번역되어 비잔티움 의학으로 넘어갔어요. 학술지 『스페쿨룸』에 실린 연구는 11세기 또는 12세기 이후 콘스탄티노플의 일상 진료에 설탕이 꾸준히 등장한다고 적어요. 정작 설탕 거래 자체의 기록은 그보다 늦게 나타나는데도요.
같은 연구가 짚는 대목이 하나 더 있어요. 설탕은 재배하고 만들고 실어 오는 데 돈이 많이 들었기 때문에, 설탕을 쓴 처방은 그 자체로 건강에 들이는 상당한 지출이었다는 거예요. 비싸서 귀했고, 귀해서 아무 데나 쓰지 않았고, 아무 데나 쓰지 않으니 더 특별해 보였어요.
그런데 여기서 조심할 게 있어요. "설탕이 약이었다"는 말은 설탕이 병을 고치는 만병통치약으로 여겨졌다는 뜻이 아니에요. 영국 국립기록보관소의 자료는 중세의 설탕이 육두구나 생강 같은 향신료이자, 음식이 상하지 않게 하는 보존제이자, 약으로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세 가지를 나란히 적어요. 약재이면서 동시에 다른 약을 마시기 좋게 만드는 바탕이었던 거예요. 쓴 약을 삼키게 만드는 것도 그 시절에는 기술이었으니까요.
그러니 이 대목은 이렇게 적는 게 정확해요. 유럽에서 설탕이 처음 자리 잡은 곳은 부엌이 아니라 약방과 향신료 상점이었어요. 무엇의 약이었는지를 한 줄로 말하기는 어렵고, 그 자리를 만들어 준 것은 이슬람 세계의 의학이었어요.
여기서 기억할 것 널리 도는 이야기의 절반은 사실이었어요. 다만 '만병통치약'이 아니라 '약방의 물건'이었다는 한정이 붙습니다.
여왕의 이가 검어질 때까지
약방의 물건은 곧 과시의 물건이 됐어요. 값이 비싸다는 사실 자체가 쓸모가 된 거예요.
영국 국립기록보관소는 엘리자베스 1세 시대에 이르러 설탕이 지위의 상징이 됐다고 적어요. 독일에서 온 여행자 파울 헨츨러가 예순다섯의 여왕을 보고 치아 상태를 기록으로 남겼는데, 설탕을 너무 많이 쓴 탓으로 보인다고 적었어요. 흔히 알려진 이 일화가 말해 주는 것은 여왕의 건강이 아니라 설탕을 마음껏 쓸 수 있다는 것이 그때는 눈에 보이는 신분 표시였다는 사실이에요. 비쌀수록 더 사고 싶어지는 물건이 있는데, 설탕이 한동안 그 자리에 있었어요.
그 자리는 오래가지 않았어요. 같은 자료는 1575년부터 1650년 사이에 요리책이 유행하면서 설탕이 조금씩 더 많은 사람이 살 수 있는 식재료로 바뀌기 시작했고, 17세기에는 런던의 일부 가정에서도 설탕을 살 수 있었다고 적어요. 왕실의 물건이 부유한 집의 물건이 되고, 다시 도시 가정의 물건이 되는 순서예요.
설탕 혼자 힘으로 된 일은 아니었어요. 같은 시기에 차와 커피와 코코아가 유럽에 자리를 잡았어요. 셋 다 그대로 마시면 쓴 음료예요. 설탕이 싸질수록 그 음료들이 더 팔렸고, 그 음료들이 퍼질수록 설탕이 더 필요해졌어요. 서로의 수요를 키우는 짝이었던 거예요. 설탕의 소비량만 따로 떼어 보면 왜 그렇게 늘었는지 설명이 잘 안 되는 이유가 여기 있어요.
숫자로 보면 이래요. 민츠의 집계로는 영국의 1인당 연간 설탕 소비량이 1704년에 4파운드, 1800년에 18파운드, 1900년에 90파운드였어요. 두 세기 사이에 스무 배가 넘게 늘어난 거예요. 그런데 이만큼을 대려면 어디선가 그만큼을 만들어야 했어요. 그 이야기가 다음 장면이에요.
여기서 기억할 것 수요가 만들어진 자리예요. 이 수요를 무엇으로 채웠는가가 이 이야기에서 가장 무거운 대목으로 이어집니다.
숫자를 두 개로 세는 이유
대서양 노예무역의 규모를 말할 때는 숫자를 두 개로 세요. 그냥 세는 방식이 두 가지인 게 아니라, 두 숫자가 각각 다른 사실을 말하기 때문이에요.
에모리대학교가 운영하는 노예무역 데이터베이스는 1501년부터 1866년까지 아프리카에서 배에 태워진 사람을 약 1,250만 명으로,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에 내린 사람을 약 1,080만 명으로 추정해요. 앞의 숫자를 승선, 뒤의 숫자를 도착이라고 불러요. 그리고 두 숫자의 차이가 항해 중에 목숨을 잃은 사람의 수예요. 어느 쪽 기준인지 밝히지 않은 숫자는 그것만으로 절반쯤 틀린 문장이 돼요. 이 데이터베이스는 대서양 항로만 다루고, 사하라를 건넌 항로나 인도양 쪽은 세지 않아요.
내린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요. 휴스턴대학교의 디지털히스토리 자료는 지금의 미국 땅에 내린 사람이 전체의 6%였고, 60~70%는 브라질이거나 카리브의 설탕 식민지에 내렸다고 적어요. 에모리대 집계로 아프리카에서 지금의 미국 땅으로 곧장 실려 간 사람은 38만 8,000명이에요. 미국 노예제의 이미지 때문에 사람들이 가장 크게 틀리는 대목이 여기예요.
그럼 설탕은 그중 얼마를 차지했을까요. 여기서는 단정을 피해야 해요. 노예제는 설탕보다 앞서 있었고, 담배와 쌀과 면화와 커피와 광산도 있었으니까요. 확인되는 것은 규모예요. 영국 왕립박물관 그리니치는 노예가 된 사람의 3분의 2 가까이가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했다고 적어요. 이건 데이터베이스가 센 값이 아니라 역사학자들이 추정한 값이에요. 그러니 "설탕이 노예무역을 만들었다"가 아니라 "이 무역이 향한 곳의 상당 부분이 설탕이었다"가 정확한 문장이에요.
왜 하필 설탕이었을까요. 사탕수수는 베어 낸 뒤 시간이 지날수록 당이 줄어들어요. 밭에서 짜는 공정까지 최대한 빨리 이어져야 하고, 그래서 밭과 압착·제당 시설이 한자리에 붙어 있어야 해요. 곡물처럼 거둬서 창고에 넣었다가 나중에 처리할 수가 없어요. 이 성질이 농장을 크게 만들었고, 수확기마다 한곳에 아주 많은 사람을 묶어 두는 구조를 만들었어요.
여기서 기억할 것 이 편에서 가장 조심해야 할 자리예요. 기준(승선·도착·항로)을 밝히는 것만으로 서술이 정확해집니다.
당밀에 붙은 관세가 대서양의 규칙을 정했다
사탕수수 즙을 졸여 설탕 결정을 걸러 내면 끈적한 액체가 남아요. 당밀이에요. 여기에 아직 당이 남아 있어서 발효시키면 술이 되고, 그 술을 증류하면 럼이 돼요. 설탕 공장에서 버려질 뻔한 부산물에 따로 값이 붙은 거예요.
이 부산물이 얼마나 큰 거래였느냐면, 여기에만 붙는 법이 따로 만들어졌어요. 1733년 영국은 당밀법을 제정해 외국산 당밀에 갤런당 6펜스의 관세를 매겼어요. 미국 국립공원관리청의 자료는 이 관세의 목적이 세금을 걷는 것이 아니었다고 적어요. 무역의 방향을 영국과 그 식민지 사이로 돌리기에 충분할 만큼 높은 관세를 매기는 것이 목적이었어요. 북아메리카 식민지의 증류업자들이 값 때문에 프랑스령 섬 대신 영국령 섬에서 당밀을 사게 만들려는 계산이었죠.
계산대로 되지는 않았어요. 관세가 높으면 밀수가 늘어요. 그래서 1764년 4월 5일에 만들어져 그해 9월 29일부터 시행된 설탕법은 방향을 바꿨어요. 외국산 당밀 관세를 갤런당 6펜스에서 3펜스로 내리는 대신, 단속을 강하게 조였어요. 세관원을 현지에 두고, 배마다 보증금과 화물 진술서를 요구하고, 재판을 지역 배심이 아니라 핼리팩스의 해사법원에서 열게 했어요. 외국산 정제설탕에는 높은 관세를 유지했고 외국산 럼은 수입을 금지했어요.
세율을 낮추면서 부담은 오히려 커진 셈이에요. 예전에는 지키지 않아도 되던 법이 이제는 지켜야 하는 법이 됐으니까요. 이 법은 포도주와 커피와 직물에도 관세를 매겼기 때문에 설탕 하나만의 이야기는 아니에요. 다만 이름이 설탕법인 데는 이유가 있었어요.
여기서 보이는 구도가 뒤에도 계속 반복돼요. 식민지는 원료를 만들고 본국은 정제와 가공을 맡는 분업이 관세로 굳어졌어요. 어느 쪽이 무엇을 만들지가 땅과 기후만이 아니라 법으로 정해진 거예요.
여기서 기억할 것 값을 정한 것이 시장만은 아니었다는 이 편의 규칙이, 여기서 처음 또렷하게 드러납니다.
가장 돈이 되던 식민지가 멈춘 뒤에 온 것
카리브의 프랑스령 생도맹그는 설탕과 커피로 자란 섬이었어요. 미국 국무부 역사관은 이 식민지가 1760년대에 아메리카에서 가장 수익성이 높은 식민지가 되어 있었다고 적어요.
1791년 8월 22일, 이곳에서 봉기가 시작됐어요. 싸움은 십수 년 이어졌고 1804년 아이티가 독립했어요. 미국에 이어 아메리카에서 두 번째로 독립한 나라였어요. 가장 돈이 되던 설탕 산지가 산업으로서 무너진 거예요.
노예제는 여러 나라에서 차례로 폐지됐어요. 그런데 폐지가 곧 이야기의 끝은 아니었어요. 농장은 그대로 있었고, 갈아 낼 사탕수수도 그대로 있었어요. 영국 식민지의 농장들은 다른 방식으로 사람을 데려왔어요. 계약노동이에요.
리즈대학교의 연구 프로젝트가 정리한 집계로는 1834년부터 1917년 사이에 남아시아에서 약 130만 명이 계약노동자로 떠났어요. 모리셔스가 1834년에 가장 먼저 모집을 시작해 45만 명 넘게 받았고, 피지가 1879년에 가장 늦게 시작해 6만 명 넘게 받았어요. 트리니다드와 영국령 기아나, 나탈도 목적지였어요. 목록에 설탕 식민지가 유난히 많아요. 1902년 브뤼셀 협약을 다룬 한 연구 논문도, 노예 해방 뒤 서인도의 농장에 중국과 인도에서 온 계약노동자가 들어와 있었다고 적어요.
계약노동은 노예제와 같은 것이 아니었어요. 기간이 정해진 계약이었고 임금이 있었어요. 자발적인 이주와 같은 것도 아니었어요. 모집 과정과 계약 조건, 돌아갈 권리를 두고 오랫동안 논란이 있었으니까요. 확실한 것은 하나예요. 한 제도가 끝난 자리에 곧바로 다른 제도가 들어왔고, 갈아야 할 사탕수수의 양은 줄지 않았어요.
여기서 기억할 것 밀려난 제도의 자리를 무엇이 채웠는가 — 폐지에서 이야기를 끊으면 그다음 여든 해가 통째로 사라집니다.
온대의 밭에서 설탕이 나오기 시작했다
판을 뒤집은 것은 정치가 아니라 채소였어요. 정확히는 채소를 들여다본 화학자였고요.
1747년 프로이센의 화학자 안드레아스 지기스문트 마르그라프가 사탕무에 사탕수수와 같은 당이 들어 있다는 것을 증명했어요. 그런데 그 발견은 그의 생전에 학문적인 결과에 머물렀어요. 뽑아낼 수는 있지만 사서 쓸 만한 값으로 만들 수는 없었으니까요. 발견과 산업 사이의 거리는 이 이야기에서 여러 번 나와요.
그 거리를 좁힌 사람이 그의 제자 프란츠 카를 아하르트예요. 1801년 아하르트가 슐레지엔의 쿠네른에 세계 최초의 사탕무 설탕 공장을 세웠어요. 그리고 때가 맞았어요. 1806년부터 1813년까지 이어진 나폴레옹의 대륙봉쇄로 유럽 대륙에 카리브산 설탕이 들어오지 못하자, 대륙 곳곳에 사탕무 공장이 생겼어요. 열대에서만 나던 물질이 온대의 밭에서 나오기 시작한 거예요.
다만 첫판은 사탕무가 졌어요. 앞서 인용한 업계 연혁 자료는 봉쇄가 끝난 1818년 무렵 사탕수수 설탕 값이 3분의 1 수준으로 떨어져 독일의 사탕무 공장들이 수지를 맞추지 못했다고 적어요. 정치가 열어 준 시장은 정치가 닫히면 함께 닫혀요.
한편 사탕수수 쪽에서도 원가가 내려가고 있었어요. 1846년 뉴올리언스 출신의 기술자 노르베르 리유가 다중효용 증발관으로 미국 특허 4,879호를 받았어요. 즙에서 물을 날리려면 계속 끓여야 하는데, 통을 여러 개 이어 붙이고 뒤로 갈수록 압력을 낮추면 앞 통에서 나온 김이 뒤 통을 데우는 열로 다시 쓰여요. 한 번 땐 연료가 여러 번 일하는 구조예요. 같은 연료로 더 좋은 설탕을 더 많이 얻게 됐고, 이 원리는 지금도 산업용 증발 공정의 바탕이에요. 리유는 1806년 뉴올리언스에서 기술자인 아버지와 노예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고, 1843년 한 농장에 증발관을 설치해 성과를 보였어요.
이제 양쪽이 다 싸질 준비를 마쳤어요. 남은 것은 누가 먼저 값을 던지느냐였는데, 그 방아쇠를 당긴 것은 공장이 아니라 세무서였어요.
여기서 기억할 것 발견은 오래 잠들어 있다가 정치가 흔들 때 깨어났어요. 그리고 한 번 깨어난 뒤에도 곧바로 이기지는 못합니다.
값이 무너진 자리에 있던 것은 수출 장려금이었다
19세기 유럽 대륙의 사탕무 산업은 이상한 방식으로 값을 낮췄어요. 국내 소비자에게 설탕 소비세를 걷은 뒤, 수출한 양에 따라 그 돈을 생산자에게 돌려줬어요. 장려금이라고 불러요.
효과는 분명했어요. 국내에서 걷은 세금이 수출업자에게 돌아가니, 그 나라 설탕은 세계 시장에서 원가보다 싸게 팔 수 있었어요. 1902년 브뤼셀 협약을 다룬 연구 논문은 1870년대에 이 장려금 제도와 새 기술이 겹치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독일의 설탕이 세계에서 가장 싸졌다고 적어요. 프랑스가 1884년에 같은 방식을 따라 하면서 두 나라 사이에 '장려금 전쟁'이 벌어졌어요. 미국과 영국의 소비자 시장을 두고 벌인 싸움이었어요.
값은 무너졌어요. 같은 논문이 인용한 집계로 설탕 값은 1872년부터 십수 년 사이에 약 50% 내렸어요. 그리고 1881년에서 1883년 사이 어느 해에, 세계 사탕무 설탕 생산이 사탕수수 설탕 생산을 처음으로 넘어섰어요. 논문 자체가 정확히 어느 해인지는 특정하지 않아요.
영국은 반대 방향으로 움직였어요. 1846년 설탕관세법으로 설탕 관세를 단계적으로 없애기 시작했고, 1874년에는 완전히 없앴어요. 서인도 농장주들이 누리던 특혜가 사라진 거예요. 농장주들은 노예 노동으로 만든 브라질산 설탕이 무관세로 들어오면 서인도 경제가 무너진다고 반발했어요. 세계에서 가장 큰 설탕 소비 시장이, 세상에서 가장 싼 설탕에 문을 활짝 연 순간이었어요.
그다음이 지금 우리가 아는 설탕이에요. 민츠의 집계로 영국의 1인당 연간 소비량이 1900년에 90파운드가 된 것이 바로 이 시기의 결과예요. 값이 내려가자 소비가 폭증했어요. 약방과 왕실의 물건이었던 것이 노동자의 차 한 잔에 들어가게 된 거예요.
장려금 전쟁은 결국 조약으로 정리됐어요. 1902년 3월 5일 브뤼셀에서 협약이 서명됐고, 가입국은 수출 장려금을 없애고 장려금을 받은 설탕이 들어오면 그 나라가 어디든 금지하거나 상계관세를 물리기로 했어요. 사탕무와 사탕수수의 경쟁 조건을 국제 규칙으로 맞추려는 시도였어요.
여기서 기억할 것 기술이 값을 내릴 준비를 해 뒀다면, 마지막으로 민 것은 세법이었어요. 이 편의 뼈대가 여기서 완성됩니다.
지금 설탕 값을 흔드는 것은 무엇일까
지금 설탕은 세계에서 가장 많이 만들어지는 식품 원료 가운데 하나예요. 미국 농무부 해외농업국의 2026년 5월 전망으로 2026/27 작물연도 세계 생산은 원당 기준 1억 8,490만 톤, 수출은 6,230만 톤이에요.
생산의 지도는 이렇게 그려져요. 같은 전망으로 브라질이 4,250만 톤으로 가장 많고, 인도가 3,360만 톤, EU가 1,440만 톤, 중국이 1,270만 톤, 태국이 950만 톤, 미국이 800만 톤이에요. 사탕무가 한 번 앞섰던 시기가 있었지만 지금 1·2위는 사탕수수를 쓰는 나라들이에요. 한 번의 역전이 영구적인 교체는 아니었어요.
지금 설탕 값을 흔드는 것 중 하나는 뜻밖에도 연료 정책이에요. 브라질의 제당 공장은 들어온 사탕수수를 설탕과 에탄올 중 어디로 보낼지 그때그때 정해요. 미국 농무부는 브라질이 휘발유의 무수에탄올 혼합 비율을 27%에서 30%로 올린 뒤 에탄올 쪽 수요가 강해져, 2026/27년에는 에탄올 52 대 설탕 48로 배분이 기울 것으로 봐요. 같은 사탕수수가 연료로 더 가면 세계 설탕 공급이 그만큼 줄어요.
제도는 여전히 값의 한복판에 있어요. 미국 농무부의 같은 자료를 보면, 인도는 정부가 정한 최저 수매가를 공장이 농민에게 반드시 지급하게 하고, 공장이 국내에 팔 수 있는 양과 최저 판매가까지 규제해요. 공장마다 사탕수수를 사들일 구역이 지정돼 있고 그 구역의 농민은 그 공장에 팔아야 해요. 미국은 수입 쿼터로 들어오는 양을 관리하고요. 열여덟 세기의 당밀법과 방식은 다르지만, 제도가 값을 정한다는 구도 자체는 남아 있어요.
그리고 이 물질에는 이제 다른 종류의 규칙이 하나 더 붙어 있어요. 2015년 3월 4일 WHO는 유리당 섭취를 총 에너지 섭취량의 10% 미만으로 줄이라고 권고했고, 5% 미만으로 더 줄이면 이득이 더 있다는 조건부 권고를 함께 냈어요. 여기서 유리당은 제조자나 조리자나 먹는 사람이 넣은 당, 그리고 꿀·시럽·과일주스에 원래 들어 있는 당을 말해요. 신선한 과일과 채소, 우유에 원래 들어 있는 당은 여기 들어가지 않아요. 이 범위를 빼고 숫자만 옮기면 다른 이야기가 돼요.
여기서 기억할 것 뉴스에서 보는 설탕 값 기사와 성분표의 권고가 어디서 온 것인지 — 둘 다 이 이야기의 연장선입니다.
다음 장면에서 무엇을 볼 것인가
앞일을 맞히려 들 필요는 없어요. 대신 이 이야기가 알려 준 규칙에 비춰, 무엇을 보고 있으면 판이 움직이는 것을 먼저 알아챌 수 있는지만 정리해 볼게요.
첫째, 설탕과 연료의 갈림길이에요. 브라질의 제당 공장이 사탕수수를 어느 쪽으로 보내는지가 세계 공급을 좌우해요. 이 배분은 시장 가격만이 아니라 혼합 비율 같은 정책으로도 움직이니까, 다른 나라의 에너지 정책이 설탕 값 기사에 등장하는 일이 계속 있을 거예요.
둘째, 제도의 방향이에요. 이 이야기에서 값을 크게 움직인 것은 대체로 관세와 장려금과 쿼터였어요. 지금도 인도의 수매가와 판매 규제, 미국의 수입 쿼터가 그 자리에 있어요. 값이 크게 흔들릴 때는 날씨 기사보다 정책 기사를 먼저 보면 원인이 빨리 잡혀요.
셋째, 세금의 성격이 바뀌는 지점이에요. 지난 삼백 년 동안 설탕에 붙은 세금은 무역의 방향을 돌리거나 자국 산업을 밀어 주기 위한 것이었어요. 그런데 지금 늘어나는 세금은 성격이 달라요. WHO 집계로 설탕 든 음료에 세금을 매기는 나라는 116개국인데, 흔한 탄산음료 값에서 세금이 차지하는 비율의 중앙값은 약 2%예요. 과일주스나 가당 우유처럼 당이 많은 다른 음료가 과세 대상에서 빠져 있는 경우도 많고요. 제도가 있다는 것과 제도가 작동한다는 것은 다른 이야기라는 걸 이 두 숫자가 함께 보여줘요.
넷째, 사탕무와 사탕수수의 자리예요. 한쪽이 앞섰던 시기가 있었고 지금은 다시 반대예요. 기후와 농지 사정, 그리고 각국의 보조 정책이 이 균형을 계속 건드려요. 어느 쪽이 이겼다고 말할 수 있는 순간은 아직 오지 않았어요.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요. 이 이야기에서 설탕의 자리를 바꾼 것은 대체로 설탕 바깥에 있었어요. 이슬람 의학의 처방집, 대륙봉쇄, 세관원의 단속 방식, 수출 장려금, 휘발유의 혼합 비율. 다음번에 이 물질의 값과 자리를 바꿀 것도 아마 설탕에 관한 뉴스가 아닌 곳에 있을 거예요. 어디일지는 지켜볼 만해요.
여기서 기억할 것 예측이 아니라 관전법이에요. 연료 배분, 제도의 방향, 세금의 성격, 두 작물의 균형 — 네 곳만 보면 됩니다.
흔한 오해
설탕은 처음부터 음식이었다.
유럽에 들어올 때의 설탕은 약방의 물건에 더 가까웠어요. 이슬람 세계에서 설탕을 바탕으로 만든 물약과 시럽이 비잔티움 의학으로 넘어갔고, 영국 국립기록보관소는 중세의 설탕이 향신료이자 보존제이자 약이라는 세 역할을 함께 했다고 적어요. 넓은 계층의 식재료가 된 것은 그 뒤의 일이에요.
대서양을 건넌 사람은 주로 미국으로 갔다.
아프리카에서 지금의 미국 땅으로 곧장 실려 간 사람은 38만 8,000명이에요. 휴스턴대 디지털히스토리는 이것이 전체의 6%이고 60~70%는 브라질이나 카리브의 설탕 식민지에 내렸다고 적어요. 미국 안의 노예 인구가 뒤에 크게 늘어난 것과, 배에 실려 온 사람의 수는 다른 이야기예요.
노예무역의 규모는 하나의 숫자로 말할 수 있다.
기준이 둘이에요. 에모리대 데이터베이스 추정으로 아프리카에서 배에 태워진 사람은 약 1,250만 명, 대서양을 건너 내린 사람은 약 1,080만 명이에요. 차이가 항해 중 사망자예요. 게다가 이 집계는 대서양 항로만 다뤄요. 어느 기준인지 밝히지 않은 숫자는 그것만으로 절반쯤 틀린 문장이 돼요.
노예제가 폐지되면서 설탕 농장의 노동 문제도 끝났다.
폐지 뒤 영국 식민지의 농장들은 계약노동으로 사람을 채웠어요. 리즈대 연구 프로젝트의 집계로 1834년부터 1917년 사이에 남아시아에서 약 130만 명이 계약노동자로 떠났고, 모리셔스가 가장 먼저 모집을 시작해 45만 명 넘게, 피지가 가장 늦게 시작해 6만 명 넘게 받았어요.
사탕무가 사탕수수를 밀어냈다.
19세기 말 몇 해 사이에 세계 사탕무 설탕 생산이 사탕수수를 처음 넘어선 적이 있어요. 하지만 지금 세계 설탕 생산의 1·2위는 사탕수수를 쓰는 브라질과 인도예요. 한 번의 역전이 영구적인 교체는 아니었어요.
설탕 값은 시장이 정해 왔다.
이 물건의 값은 오랫동안 제도가 함께 정했어요. 외국산 당밀에 매긴 관세, 서인도 농장주에게 준 특혜, 그 특혜를 없앤 관세법, 수출량에 따라 세금을 돌려준 장려금, 장려금을 막으려 만든 국제협약이 차례로 값을 움직였어요. 지금도 인도의 최저 수매가와 판매 규제, 미국의 수입 쿼터 같은 제도가 시장과 함께 작동해요.
그래서 한마디로
설탕이 유럽에서 처음 자리 잡은 곳은 식탁이 아니라 약방이었어요. 이슬람 의학의 설탕 물약이 비잔티움으로 넘어갔고, 비쌌기 때문에 곧 지위의 상징이 됐어요. 그 수요를 채운 것이 대서양 건너의 사탕수수 농장이었어요. 대서양 노예무역으로 아프리카에서 배에 태워진 사람이 약 1,250만 명, 대서양을 건너 내린 사람이 약 1,080만 명이고, 내린 사람의 60~70%가 브라질이나 카리브의 설탕 식민지에 닿았다고 휴스턴대 자료는 적어요. 노예제가 폐지된 뒤에는 계약노동이 그 자리를 이었고요. 값을 결정적으로 무너뜨린 것은 시장이 아니라 사탕무와 수출 장려금과 관세 철폐라는 제도였고, 값이 내려가자 소비가 폭증했어요. 지금도 이 물질의 값은 브라질의 연료 정책과 각국의 쿼터·수매가에 붙어 있고, 여기에 섭취 권고와 음료세라는 새로운 종류의 규칙이 하나 더 얹혔어요.
이 이야기의 지금
참고 자료
본문의 연도와 숫자는 아래 자료를 근거로 씁니다. 틀린 곳을 찾으시면 알려주세요.
- Documenting Slave Voyages — 트랜스아틀랜틱 노예무역 데이터베이스 Emory University 승선 약 1,250만 명과 도착 약 1,080만 명, 지금의 미국 땅으로 곧장 간 38만 8,000명
- Trans-Atlantic Slave Trade — Estimates SlaveVoyages (Emory University) 1501~1866년 승선 추정 합계와 운송국별 집계
- The history of the transatlantic slave trade Royal Museums Greenwich 노예가 된 사람의 3분의 2 가까이가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했다는 추정
- Digital History — 노예무역의 목적지 University of Houston 지금의 미국 땅 6%, 브라질·카리브의 설탕 식민지 60~70%
- Cross-cultural Transfer of Medical Knowledge in the Medieval Mediterranean — 이슬람 세계에서 비잔티움으로 건너간 설탕 물약 Petros Bouras-Vallianatos, Speculum 96권 4호, 2021 콘스탄티노플의 일상 진료에 설탕이 꾸준히 등장한 시기와, 설탕 처방이 큰 지출이었다는 서술
- The institutionalisation of free trade and empire — 1902년 브뤼셀 협약 연구 Michael Fakhri, London Review of International Law 2권 1호, 2014 1846년 설탕관세법과 1874년 관세 완전 폐지, 장려금 전쟁, 1881~1883년 사탕무의 추월, 1872년 이후 약 50% 가격 하락, 브뤼셀 협약
- WHO calls on countries to reduce sugars intake among adults and children World Health Organization 유리당의 정의와 10% 미만 권고, 5% 미만 조건부 권고
- Global report on the use of sugar-sweetened beverage taxes 2025 발표 자료 World Health Organization 116개국의 과세 현황과 세금 비율 중앙값 약 2%
- Sugar: World Markets and Trade (2026년 5월) USDA Foreign Agricultural Service 2026/27 세계 생산·수출 전망과 국가별 생산, 브라질의 에탄올 배분과 인도의 수매가·판매 규제
- Norbert Rillieux — 미국 발명가 명예의 전당 National Inventors Hall of Fame 다중효용 증발관과 미국 특허 4,879호, 그 원리가 산업용 증발의 바탕이 된 경위
- Britain Begins Taxing the Colonies: The Sugar & Stamp Acts National Park Service (미국 국립공원관리청) 1733년 당밀법의 목적과 세율, 1764년 설탕법의 세율 인하와 단속 강화
- Indentured labour from South Asia (1834-1917) Striking Women (University of Leeds) 남아시아 출신 계약노동자 약 130만 명과 목적지별 규모
- History of sugar — sugar cane and sugar beet Südzucker Group 마르그라프의 증명, 아하르트의 첫 사탕무 설탕 공장, 대륙봉쇄기의 확산과 그 뒤의 가격 붕괴
- Sugar — 교육 자료 The National Archives (영국 국립기록보관소) 중세 설탕의 세 역할(향신료·보존제·약), 엘리자베스 시대의 지위 상징, 17세기의 확산
- Sweetness and Power 강의자료 (Think 53: Food Talks) Stanford University — Sidney W. Mintz, 『Sweetness and Power』(1985) 인용 영국의 1인당 연간 설탕 소비량 변화
- The United States and the Haitian Revolution, 1791–1804 Office of the Historian, U.S. Department of State 생도맹그의 수익성과 1791년 봉기, 1804년 아이티 독립